공군 목사 이야기(3)
1. 육군과 공군
두 번째 부임지는 강원도 춘천이었다. 대공방어 체제인 나이키와 호크 미사일을 다루는 부대였다. 원래 육군 소속이었는데 적 공군 전투기를 잡는다는 이유로 공군에서 관리하도록 하여 군 체제가 바뀌었다. 92년에 갔을 때에 막 공군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이 부대의 장교와 하사관이 모두 육군 출신이었다. 공군 병사들은 시험을 치르고 공군에 온 것인데 막상 미사일 부대로 배속 받으면 많이 싫어했다. 왜냐하면 실제 적과 부딪혀 백병전을 해야 하는 육군의 성격으로 전투기를 출격시키기 위해 안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군과는 군사 문화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2. 군사 문화와 사모님
이 같은 군사 문화는 남자들만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공군은 비행단에서 딱 두 명의 사모님이 존재한다. 지휘관인 단장의 아내를 높여 사모라 하고, 종교인인 군목의 아내를 예우하여 사모라고 불렀다. 그 외의 장교와 하사관의 아내들 사이에서는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썼다. 그런데 육군에서는 남편의 계급이 한 단계만 높아도 ‘사모님’ 이라고 불렀다.
기독부인회가 있다. 매년 모여 함께 기도회를 하는데, 공군의 기독 부인이 육군의 기독 부인에게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육군 기독 부인의 계급이 한 단계 높았다. 정확하게는 남편의 계급이 한 단계 높은 것이다. ‘아주머니’라는 호칭은 육군 부인을 격노케 했다. ‘어디다가 아주머니라고 하냐?’면서 큰 소동이 났다. 같은 군인인데도 육군과 공군의 문화는 이렇게 달랐다. 선교할 때에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이런 것을 미리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은혜를 누렸다.
3. 군종 장교(軍宗將校)
어느 날 중위 계급장을 달고 춘천의 미사일 대대에 갔다. 부대 안에서 대위가 나를 보더니 손가락을 까닥이며 오라고 했다. 보통 그 상황에서는 중위가 군기가 바짝 든 태도여야 하는데 그 대위가 볼 때에 내가 좀 이상했던 모양이다. 한 마디로 중위 얼굴이 좀 늙었다. 대학원까지 마치고 군대를 간 것이니까 일반 중위의 나이도 아니었고 또 어딘지 권위가 나타나며 대위를 압도했을 수 있다.
나 보고 뭐냐고 물었다. 군종 장교라고 대답했다. 대위가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군종장교 그게 뭐지? 하는 태도였다. 그러다가 즉시 군목인 것을 알아챈 것 같다. 보통 그 정도되면 태도를 고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대위는 나를 손가락으로 불렀던 체면이 있어서인지 쉽게 고치지를 않았다. 무신론자에게는 군종 장교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다.
4. 천양지차, 두 문화
그 이후에 경험하는 육군의 문화는 미리 공군의 문화를 경험했던 나로서는 유익했다. 하루는 별 하나인 여단장이 대대를 방문했다. 부대에 떨어진 명령은 어디 숨어서 나타나지 말란다. 의상봉 부대의 경험이 생각났다. 공군참모총장이 헬기를 타고 부대를 방문하셨다. 나는 군종참모였기에 모임에 참석했다. 중위 계급이 모임에 있으니까 참모총장이 “자넨 뭔가?”하셨다. “예 군종실장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천주교 신자인 참모총장이 자세를 바르게 하시더니 거의 아들 뻘인 내게 “아, 목사님, 부대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멋있었다. 이것이 공군이구나 하는 것이 바로 머리에 꽂혔다. 내가 공군의 복음화를 위해 나의 삶을 드리자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그런데 육군의 문화가 남아있는 미사일 부대에서는 별 하나의 여단장이 떴는데 그냥 숨어 있고 보이지 말란다. 거참.
5. 군복 입은 신선(神仙)
그래도 미사일 부대에서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부대 교회 옆에는 의무실이 있었다. 군의관의 바둑 실력이 6급 정도 되었다. 당시 내가 7급 정도여서 시간이 되면 둘이 바둑을 많이 두었다. 작전과장 소령은 불교신자인데 바둑이 5급 정도 되었다. 나와 군의관이 종종 바둑을 두는 것을 아니까 이 작전과장 소령이 종종 찾아왔다. 군의관은 당시 차가 없었다. 그래서 예하 포대에 검진을 갈 때면 나의 차를 이용했다.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예하 포대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야근자 위문을 했다. 이 일은 주로 저녁에 행하기 때문에 대대를 떠나서 포대까지 갈 때에 시간 여유가 있었다. 경기도 운천 쪽의 길에는 계곡의 물이 흐르고 커다란 바위들이 많았다. 나는 바둑판을 챙겨 갖고 가서 점심을 먹은 후에 계곡의 바위 위에서 군의관과 바둑을 두었다. 뭐 거의 군복 입은 신선들의 경지였다.
작전 과장은 짓궂게 대대 본부에서 포대까지 바로 가면 3시간 정도인데 왜 7시간 걸리냐?고 물었다. 다 알면서 묻는 것이다. 그러나 악의는 없다. 작전과장도 바둑을 두고 싶어 토요일에는 내게 전화를 해서 자기 집으로 오란다. 가보면 내가 달콤한 빵을 좋아하니까 빵을 이만큼 준비했다. 그렇게 함께 바둑을 두곤 했다. 팍팍한 군생활이지만 이런 추억도 있다.
6. 조(趙) 중위님, 고맙습니다
경포대 쪽에도 미사일 부대가 있다. 겨울에는 정말 춥다. 나는 12시부터 새벽 2시 정도에 야근자 위문을 돌았다. 정말 초코파이와 커피 한 잔은 그 상황에서 영혼을 구할 수 있을만한 존재다. 중국에서 추방 된 후 공군 부대를 방문하여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지금은 통닭 한 마리를 주어도 병사들의 영혼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군목이 야근자 위문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면 밤 12시부터 새벽에 돌기를 부탁한다. 나는 군목이 스스로 고생할 것을 각오한다면 군복음화의 길은 아직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닫히기 전에 움직이자.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자. 경포대쪽 미사일 부대에서 야근자 위문을 하는데 한 병사가 “조 중위님 고맙습니다.” 하는 것이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왜냐하면 나는 한 번도 중위라는 계급으로 불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다 ‘목사님’ 했지 ‘조 중위’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병사가 처음이었다. 생각을 해보는데 그 병사가 왜 나를 계급으로 불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 병사가 불교 신자라서 그런가?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불교신자라고 나를 목사라고 부르는 것을 꺼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그 병사는 기독교의 목사인 내가 그 추운 밤에 야근자 위문을 하는 것을 고맙게 여겼다. 나는 그 때 생각했다. 이것은 정말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병사들은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때에 그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한다면 평소보다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접촉점이 된다.
7. 산길의 마주침
이 글을 쓰다 보니 하나 더 생각난다. 부대의 지휘관인 대대장이 엄씨 성을 가진 집사 직분의 기독교인이셨다. 밤중에 7-8시 정도에 대대장이 퇴근했다. 나는 그 시간에 다시 부대로 올라갔다. 병사들과의 예배와 야근자 위문 때문이었다. 그러면 산길에서 1호 지프차와 종종 마주쳤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 집사님이 나에 대한 평가를 최고로 했다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그것이 지금도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런 서류들이 있나보다 싶을뿐이다. 다만 그 때에 내가 그렇게 한 것은 ‘부대의 총괄책임은 지휘관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병사들의 영혼을 책임진다. 그러니까 나는 영혼의 지휘관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제나 어떤 일을 맡든 나는 맡은 일에 있어서 기독교와 연관 된 일에서는 그 영역의 책임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는 은혜를 주님이 주셨다.
8. 땅개, 솔개, 물개
한 번은 총신대학 때부터 함께 했던 육군 군목이 찾아왔다. 이 녀석이 나의 부대를 보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군기가 왜 이러냐?”고 했다. 한 마디로 공군을 깔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야, 너희 육군은 땅개고 우리 공군은 솔개야”
그러자 그 친구가 물었다.
“그러면 해군은 뭐냐?”
내가 답했다. “물개?”
9. 할렐루야 휴게소
동기 육군 목사 중에 김광구가 있다. 빛 광(光) 자에 구할 구(救) 자를 쓰는 것 같은데 대학 때부터 막역한 친구라 종종 미칠 광(狂) 자에 개 구(狗)자를 써서 ‘미친 개’ 목사라고 놀리곤 했다. 당시 김목사가 인제, 양구 그 쪽에서 있었는데 내가 춘천으로 왔다니까 한 번 놀러오라고 했다. 하루 날을 잡아서 놀러갔다. 그런데 홍천으로 가는 길에 약간 내리막길이면서 직선으로 뻗은 길이 있다. 오른쪽에서 트럭이 진입했다. 나는 트럭을 추월하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이 트럭이 갑자기 왼쪽 깜빡이도 켜지 않고 왼쪽의 휴게소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내리막길에 차는 가속이 붙었는데 옆에서 임신한 아내는 비명을 질렀다. 왼쪽 차도 옆으로는 도랑이 있었다. 그대로 가면 트럭과 충돌하는데 나는 도랑으로 박혀야 하나? 아니면 트럭과 박아야 하나? 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브레이크를 짧게 끊어서 밟으며 속도를 최대한 줄였다. 중고 프레스토가 갑자기 ABS 브레이크 시스템의 차가 되었다. 그리고 트럭과 정말 머리카락 하나 정도의 공간을 내고 내 차와 트럭은 휴게소로 들어섰다. 차를 세우고 트럭 운전사를 보았는데 너무 긴장해서 욕도 안 나왔다. 지금이라도 삐-처리하고 욕 좀 하자.
“삐—————————————–”
후들거리는 다리로 화장실 다녀와서 휴게소 이름을 보니 ‘할렐루야 휴게소’였다. 그날 정말 간신히 살았다. 할렐루야 휴게소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만일 아직 있다면 한 번 가보고 싶다. 그 때에 임신했던 애가 큰 아들인데 얘 데리고 가야겠다.
10. 강○○ 군종병
미사일 부대는 종종 진지를 야외로 이동하여 사격 훈련을 한다. 야외 이동 훈련을 할 때면 부대원들이 며칠 동안 야외에서 생활하기에 나는 군종병과 함께 위문하러 갔다. 어느 지역인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데 오르막길을 오르고 난 후에 약간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그 끝에서는 갑자기 오른쪽으로 90도가 꺾이는 길이었다. 그리고 길의 끝은 벼랑이었다. 내리막길을 가다보니 차가 자동으로 속도가 붙어 90도로 갑자기 꺾어야할 곳에서 제대로 우회전이 안 되었다. 차가 차선을 넘어 오른쪽 바퀴가 들리고 다시 왼쪽 바퀴가 들렸고 다시 오른쪽 바퀴가 들린 후에 정지했다. 속도가 조금만 더 붙었어도 차는 벼랑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 때 강원도 길이 무서운 것을 처음 알았다. 함께 타고 있던 군종병이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목사님 저 걸어가겠습니다.” 했다.
“타, 이 녀석아. 여기서 어떻게 걸어 가냐?” 군종병은 군목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차를 탔다. 그 군종병의 이름이 강○○이다. 여자 이름 같다. 피부가 아주 희고 얼굴이 잘 생겼다. 꽃미남은 꽃미남인데 여성적 이미지는 강하지 않고 헬라의 미남자와 같은 유형이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했고 교회를 그렇게 꾸몄다.
11. 운천 포대의 먹기 시합
포대 교회에 행사가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포대장이 식사를 사셨다. 고기 뷔페 집으로 갔다. 그런데 묘한 것은 고기를 먹으면서 은근히 시합이 되었다. 마치 많이 먹는 사람이 힘이 센 사람인 것처럼 여겨졌다. 네 명이서 먹었다. 쟁반에 많은 양의 고기가 담긴다. 그것을 12쟁반을 먹었다. 그리고 입가심으로 곱창 두 쟁반을 더 구워 먹었다. 내가 지금 글을 쓰면서 ‘쟁반’이란 단어를 썼다. 그것은 나의 기억에 접시가 아니었음을 말한다. 가만히 내 기억에 들어있던 것을 끄집어내어 글로 쓰는 것인데 나는 확실히 녹이 설지 않는 스테인리스의 쟁반을 기억한다.
그 다음날,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안 먹어도 되었다. 하루 종일 다른 것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과거 인간들의 생활에서 수렵과 채집 생활이 있었다고 하는데 원시인들의 식사는 오늘날처럼 매일 3식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알았다.
12. 견학과 안전
내가 공군중앙교회에 있을 때에 부대의 이름은 복지단이었다. 수송 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공군 부대를 위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서울에서 춘천까지 부대의 버스를 이용해서 다녀오는 계획을 세웠다. 춘천에서 다른 예하 포대는 멀기 때문에 갈 수 없었고 춘천 자체의 포대만 다녀왔다. 그때 이미 예편하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도 함께 모시고 다녀왔는데 한 가지 흥미롭게 들은 것은 조종사 출신의 장로님께서 포대나 레이더 부대를 다녀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종사들은 비행단에서 전투 비행을 한다. 그것이 주 임무다. 그런데 조종사들이 적 전투기를 잡아내고 대공미사일을 쏘는 부대들을 한 번 견학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협력하여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지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그때 내가 위문을 다녀 온 후에 수송부대에서는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있었나 보다. 사실 수송을 그렇게 멀리 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없는 안전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적 생각과 일을 추진하는 생각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수송부대의 염려도 알기에 그 후로 그런 일을 추진하지 않았다.
12. 군선교의 타락과 부패
중국에서 추방된 이후 강의 때문에 춘천을 몇 차례 방문했다. 그 지역의 목사에게 이야기를 듣는데 육군 군목 한 사람이 군부대를 지원하는 돈을 떼어먹는 경우가 있었나보다. 순수한 기독교인들은 돈을 주어서 군 선교가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실 선교나 전도는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돈이 없는 것이 더 군 선교를 잘 할 수 있다. 문제는 군목의 헌신이다. 군목의 활동은 한다고 해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안 한다고 해서 그 게으름이 발각되지도 않는다. 사실 단기 군목을 하고 나갈 것이면 적당히 놀다 나가도 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쌓여서 결국은 군 선교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젊은 병사들이 본 그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그들이 사회의 기성층이 되었을 때에 기독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결과까지 낳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비판을 당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세상 목사들의 썩음은 두고두고 악취가 진동한다. 군목이 똑같이 타락하고 부패하면 가장 민감한 시기의 젊은이들이 병사 시절 그것을 보고 이 땅에서 기독교는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들이 왜 사회주의자가 되어 가는지 생각하자.
군목들이여, 밤 시간을 이용하자. 야근자 위문을 막을 것은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 만나라. 한마디라도 더 진심을 갖고 해라. 그것을 매일 밤 하겠다는 정열을 가져라. 체력을 키워라. 그밖에 군선교의 방법을 찾아라. 현장에 있으니 현장에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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