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목사 이야기(9)
1. 냉커피와 박사과정의 훈련병
30도가 넘어 더위를 느끼게 되는 6월의 어느 날로 기억된다. 내가 복무하던 예천 비행단이 아니고 광주 비행단에서 일어난 일 하나를 떠올려본다. 이 유명한 이야기를 당시의 공군 기독교인들은 아마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한 청년이 어떻게 공군이 되어 들어오게 된 모양이다. 아마도 단기사병 그러니까 방위 훈련이었을 수 있다. 군산 비행단에서 단기사병들이 3주 동안 병영훈련을 받으니까 광주비행단에서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당시 교회는 훈련을 받던 병사들을 위해 여름에 냉커피를 제공했다. 많은 병사들이 예수님을 안 믿어도 그 냉커피를 마시고 싶어 교회를 찾았던 모양이다. 이 박사과정의 친구도 냉커피를 마시려고 교회에 왔다. 병사들이 줄 선 순서대로 냉커피를 마시는데 예상 밖으로 병사들이 많이 와서 냉커피가 부족했다. 박사과정의 병사는 자기 차례까지는 마실 줄 알았는데 그만 자기 앞에서 냉커피가 완전히 떨어졌다. 그 병사는 털썩 주저앉아 울었다. 나는 그 장면을 직접 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상상이 간다. 여 집사님들이 그 박사과정의 병사를 달래고 급히 냉커피를 만들어 나머지 병사들에게도 제공했다. 울음을 그치고 냉커피를 마시는 박사과정의 병사를 생각해보라. 마치 네 다섯 살의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어서 막 울다가 부모가 사주니까 울음을 그치고 아직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남아있는데 그 먹고 싶었던 것을 먹는 모양새다.
2. “우리 육군이 이기게 하옵소서”
최근에 나의 동기 목사의 아들이 육군 군목으로 임관했다. 총신대학교,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을 나오고 군목으로 임관했으나, 정확하게 내가 지나온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다만 공군 군목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얼굴이 잘 생기고 또 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공군 군목이어야 하는데. ㅎㅎㅎ 이런 이야기 듣고 육군 군목들 화낼 수 있겠다.^^
임관한 동기 목사의 아들을 위해 한 육군 군목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총신대 출신 중 미국 육군 군목이 된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정말 배꼽 빠지게 웃기는 말을 잘한다. 그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육군과 해군이 만나서 축구 시합을 하는 것이 있나보다. 시합 전에 군목이 기도를 하는데 육군 군목이 기도를 하게 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간부들과 병사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하나님, 이 시합이 공정하게 치러지게 하시고 다치는 사람이 없게 해주시고 이 시합을 통해서 육군과 해군의 우정이 더 깊어지게 해 주시고 뭐 등등 이런 기도 내용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다 그러려니 하고 듣고 있는데 육군 군목의 마지막 기도가 다음과 같았다.
“그러나 주여, 이 모든 기도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육군이 이기게 하옵소서.”
육군 전체가 빵 터졌다. 육군은 지휘관, 병사 할 것 없이 모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일치된 목소리로 ‘아멘’을 외쳤다. 후에 들리는 이야기가 그 육군 군목은 다른 것 볼 것 없이 그 기도 하나로 진급했다고 했다. 육군 군목이 된 동기 목사의 아들은 이 이야기를 잘 기억하기를 바란다.
3. 설교할 수 없었던 병문안 예배
이 분의 이름은 밝혀 두는 것이 좋겠다. 2020년 현재 예천 비행단 교회를 지키고 있는 분은 신○○ 장로 박○○ 권사이다. 1995년 내가 비행단 군목으로 갔을 때에 두 분은 집사의 직분이셨다. 나의 큰 아들 한음이가 93년생이니까 3살 때였다. 그 집 아들이 ‘○○’이인데 85년생이다. 아이가 아주 착해서 한음이를 잘 데리고 놀아주었다.
세상도 그렇지만 군대에서도 종종 회식이 있다. 이 회식에서는 술이 돌고 어떤 경우에는 2차, 3차를 가면서 색시 집을 가는 군인들도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하면 그 일을 끝까지 파고 드는 일종의 기자와 같은 기질이 있다. 의상봉 부대에서도 부대원 회식이 있었다. 보통 목사는 ‘여러분들 다녀오세요.’ 하고 자리를 피해주는데 나는 회식 자리에 참석해서 그들이 어떻게 노는 지 다 지켜보려고 했다. 1차는 당연히 식사이다. 그리고 2차서부터 술자리가 되는데 나는 2차 술자리도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부대원들이 목사님은 빠져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2차 술자리를 가지 못했다. 이런 게 보통 공군인데 방공포대는 달랐다. 앞서 말했지만 나와 바둑을 두던 작전과에 있던 불교의 소령은 친해져서 그런 것인지 어떤 때는 회식 자리에서 ‘목사님도 술 한 잔 받으시라.’고 했다. 그러니까 기존 공군 문화는 군목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군 문화로 들어가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군의 문화는 군목도 일종의 계급으로 보려는 성향이 강해 상급자라는 이름으로 군목에게 술을 권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문화적 풍토를 갖고 있다.
신○○ 집사는 보통 2차까지 갔을 것이다. 그런데 회식 자리에서 돌아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나는 병문안을 하고 예배하며 설교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약 6개월 후, 또 교통사고가 났다. 사람이 평생에 몇 번 교통사고가 나는 사람도 있지만 확률상 높지 않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그렇게 두 번째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문제는 내가 병문안 심방을 가서 뭐라고 설교할지 막막했다. 나는 보통 심방을 가면 그 전에 무엇을 본문으로 잡고 설교해야하겠다 하는 것이 떠오르거나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주제를 정한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병원 심방 때에 말했다. ‘미안하지만 집사님, 내가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고 또 주님께서도 말씀해주시지 않습니다.’ 했다. 그래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돌아왔다.
특별한 일은 그날 저녁에 일어났다. 새벽 두시인가? 집사님이 잠에서 깨었다. 사방이 조용한데 복도에서 집사님을 부르는듯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아, 글을 쓰면서 벌써 소름이 돋는 느낌이다. 집사님이 병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는데 거기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집사님 마음에 ‘너 계속하면 죽어!’ 라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그 날 이후로 신 집사님은 술을 끊었다. 그리고 주일학교 부장을 맡고 주님의 일에 아주 열심이었다. 나는 처음에 비행단 교회에 가서 이분 이름을 보고 주님의 사람인 줄 알았다. 이름에 신임이란 단어가 들어간다. 신임! 어떻게 신임(信任)을 안 할 수 있나?
4. 기억이 애틋한 군인교회 지킴이
비행단 교회를 장교들이 지키기는 어렵다. 장교들은 몇 년이 지나면 보직이 바뀐다. 그래서 다른 비행단이나 공군의 기관으로 옮긴다. 오히려 비행단 교회를 지키는 것은 하사관 계급의 교인들이시다. 내가 1993년에 군산비행단을 갔는데 그때부터 지금 2020년까지 군산비행단 교회를 지키는 분은 금길주, 장윤희 권사님이시다. 금길주, 이분은 당시 안수집사였는데 지금은 장로가 되셨을 것이다. 말씀의 표현 중에 ‘초곤초곤’ 이런 표현을 잘 쓰신다. 그래서 나한테는 이 분 별명이 ‘초곤초곤 집사님’이 되었다.
폭발물 무기 안전에 대한 특기를 받은 차○○ 집사가 있었는데 이 집사님은 나하고 나이가 같아서 볼링, 농구, 낚시 등등 함께 아주 재미있게 놀았다. 지금은 장로가 되셨다. 특기가 폭발물 무기 안전이라 나중에 청와대 경호실에 소속되기도 했다. 그래서 군산 비행단에 계속 남아있지 못했지만 거의 군산 교회 터주 대감에 속한다.
예천 비행단 교회를 지키는 분은 바로 신○○ 장로, 박○○ 권사이시다. 아마도 현재 각 비행단 교회들에는 이렇게 공군 교회를 위해 끝까지 충성하시는 분들이 남아계실 것으로 짐작된다. 군목들은 이분들에게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공군 복음의 부흥을 위한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글을 쓰면서 정말 마음이 아프다. 내가 예천 비행단에서 복무할 때에 관사 교인이 70가정 정도가 되었다. 전입전출을 다 평균 잡아보아도 최소 50가정은 항상 함께 예배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1/5에서 1/10로 준 것 같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다. 예천 비행단에는 성가대가 있었다. 그때 성가대 지휘를 조종사인 전○○ 집사님이 맡았다. 내가 음악 실력도 없으면서 괜히 민감해서 성가대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사람 듣는 노래한다고 막 혼낸 적이 있었다. 전○○ 집사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고 겸손한 분이신데 성가대 소리에 관해 내가 말을 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 지휘를 맡는 것이 전 집사님이셔서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그분께 죄송한 결과가 되었다.
5. 공군 기독교의 부흥을 꿈꾸며
내가 중국에서 추방된 후에 2018년 초 여름, 예천 비행단 교회에서 나를 초청하여 설교하러 한 번 방문했다. 그런데 관사 영외자 교인이 거의 없었다. 병사들도 인권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이전처럼 많은 수의 병사들이 예배드리지 않았다. 이것을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까?
방법은 있다. 반드시 있다. 공군 목사단은 이것을 찾아야 한다. 한 가지 힌트를 말하면 예편한 공군 기독교 장교들이 모여 있는 곳은 서울의 공군중앙교회이다. 각 비행단에는 하사관 출신의 장로, 권사님들이 교회를 지키고 있다. 이분들에게 공군 목사단은 문의하고 일정한 시간동안 방안을 만들어 주시기를 청하면 어떨까? 그 다음에 그분들을 모두 모아 의견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한 번에 되지 않고 정말 부흥시킬 수 있는 방안들이 채택될 때까지 몇 번 하는 것이 좋다. 이 회의에는 현역 공군 목사들이 참석하고 함께 논의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방안을 각 비행단에서 시행한다. 아마 관제부대와 방공포부대는 군목인력이 지금은 미치지 못할 줄 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지역의 신실한 민간 교회 목사님들을 찾고 계획을 말씀드리고 충분히 숙지시킨 후 부탁을 드려서 이 전체의 계획이 동시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시행되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복음기도신문]
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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