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결핍과 불편한 현실 담은 <브릴로 상자>
1964년 앤디 워홀이 발표한 작품 <브릴로 상자>는 수세미(soap pad) 상자를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슈퍼에서 파는 수세미 상자와 똑같은 이 ‘예술 작품’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 작품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워홀의 입장에 아직 논란이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워홀의 작품이 사고파는 데에 집중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데에 동의한다.
<브릴로 상자>는 오로지 생산 자체만을 위한 산업 시스템뿐만 아니라, 생산한 것들을 판매하기 위해 동원되는 광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살 때에만 존재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결핍과 같은 불편한 현실을 담고 있다.
섬김으로 새로운 창조를 드러낸 <즙>
반면 여기 소개되는 조각가 오의석의 작품 <즙>은 워홀의 이러한 냉소를 기쁨으로 바꾸었다. 오의석의 <즙>은 사과즙 상자를 쌓은 설치 작품으로, 작가가 실제로 6년간 대구의 사과밭을 일구며 얻은 결실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서, 하나님의 모형이자 조력자인 인간이 그분의 창조 행위를 이어가는 데에 관심이 있었고, 그렇게 농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곧 작가에겐 농사가 예술이었다.
태초의 창조 섭리대로, 지금도 정확하게 계절에 따라 사과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그는 벅찬 감동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조력자로 끼워 주신 것에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작품이 내 안에 머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길 때만이 또 다시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마음에서 그는 정성껏 키운 사과들로 즙을 짜서 전시장에 온 관람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과정 예술(process art) 작품 <즙>을 제작하였다. 이렇게 <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신 상징을 담았다.
관람객들 손에 들린 달달한 사과 <즙>은 생산/소비의 공허한 울림 곧 워홀의 <브릴로 상자>에 대한 명쾌한 반전이었다. [GNPNEWS]
이상윤(미술평론가)
필자는 현대미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미술사 속에서도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가고 있다. 현재 서울대, 국민대, 한국 미술계를 사역지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