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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오직 성경(1): 하나님은 말씀을 어떻게 감동하셨는가?

▲ 사진: pixabay

여러분은 혹시 운동선수나 연주자의 “감동적인” 경기나 연주를 본 적이 있는가? 목사의 “감동적인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대개는 “감동”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경우에 쓰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감동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용어와 ‘성경이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의 논조가 너무 극단적으로 밀어부치는 듯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말씀의 권위가 유래 없이 다발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감동”의 성경적인 정의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약성경의 단어, “감동 (또는 영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 사용되고 있다. 성경은 특별히 선택 받은 사람들에 의해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되었고 그렇게 정경은 완성되었다. 오늘날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노래, 책, 환상, 시, 설교는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감동”과 우리가 가볍게 쓰는 ‘어떤 것이 감동적이었다’고 하는 것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한다. “감동”은 성경의 또 하나의 용어, “계시”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계시는 하나님 자신과 그의 뜻을 알려주는 것(열어 보여 주는 것-역자 주)이다.

“감동(영감)”은 그가 그 일(계시)을 행한 방법이다.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성경의 저자들을 통해, 정확하고 절대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인간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를 기록하셨다.

감동이 아닌 것

성경적 감동에 대해 바르게 정의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성경의 감동’을 논할 때 가지는 잘못된 개념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감동은 사람이 이룬 훌륭한 업적이 아니다. 항간에는 특히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이 호머의 <오디세이>, 모하메드의 <코란>, 단테의 <신곡> 또는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같은 책 이상의 감동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성경을 하나로 묶었든지 간에, 천재적 지능을 가진 사람이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이 “자연적인 감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래, 맞아”라고 말하면서, “성경에는 수많은 오류와 실수가 있고, 많은 점에 있어서 틀릴 수 있지만, 윤리나 도덕, 인류에 대한 통찰 등에 있어선 아주 높은 수준의 천재성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이 견해는 성경의 인간 저자들을 격찬하지만 성경과 하나님과의 관련성은 부인한다.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똑똑한 사람들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흥미로운 견해이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우선, 똑똑한 사람들이 그들 모두를 책망하는 책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에 대해서도 책을 쓰지 않을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구원받는 방법을 제시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희생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추가하면, 가장 똑똑한 사람조차도 예수 그리스도 같은 인물을 상상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재능 있는 소설가라 하더라도, 세상에서 존재했던 어느 누구보다도 순결하고 사랑이 많으시며 의로우시며 완벽하신 분을 능가하는 인물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감동”은 인간 저자의 생각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념 감동설”을 가르치는 신학자, 설교자와 성경학자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들에게 기록할 말씀을 정확하게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포괄적인 아이디어를 주셨고 그들은 이 아이디어를 그들의 생각과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랑에 대한 개념을 바울의 마음 안에 심으셨고, 이를 바울은 어느 날 펜을 들어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했다는 주장이다.

“감동”을 생각이나 개념으로 보는 견해는 하나님이 계시의 포괄적인 흐름을 주셨지만 저자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의견에는) 성경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이 음성으로 저자들에게 감동을 주시거나 감화하셨다는 것을 부인한다. 이러한 감동의 견해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아니라고 믿는다)에게 인기가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2:13에 바울은 명확하게 그가 말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다. 요한복음 17:8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 말씀하신다. 광야에서 숨어 있던 모세를 다시 보내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실 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생각할 것을 주시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2)고 하셨다. 마태복음 24:35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바로 성경의 말씀을 직접 지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설교와 가르칠 때에 대명사, 전치사 등 세밀한 접속사까지도 조심해서 설명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런 모든 “미세한 것(작은 단어)”들 안에는 종종 심오한 의미와 신령한 진리가 담겨있다.

돌이 없는 지질학이 있을 수 없고, 사람이 없는 인류학이 있을 수 없으며, 음이 없는 멜로디가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신령한 하나님에 대한 기록도 있을 수 없다. 생각은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고, 하나님은 그의 생각을 언어, 즉 말씀을 통해 계시하셨다. 성경의 말씀 자체가 감동으로 된 것이다. 성경은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신학자들은 성경의 부분적인 말씀이 아닌,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구두로 완전한 영감(verbal plenary inspiration)”이라는 용어를 쓴다. 이 점은 우리의 다음 논제로 이끈다.

셋째, “감동”은 하나님이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하시는 행위가 아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오늘날 “existential inspiration”(실존 감동)이라는 것을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의 일부분이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그것이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성경 구절을 읽는데 갑자기 소름 끼치는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면, 그 읽었던 구절은 당신에게만큼은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논리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신학자들도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하나님의 계시가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성경은 실질적으로 권위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 신학자들에게, “성경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감동을 주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신학자는 답하기를, “네, 그래요”라고 하면서 자신이 믿고 뛰어든 일종의 ‘체험담’을 이야기 할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믿고 뛰어든 것이나 직접 경험한 체험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캐 물으면, 그건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며 간단히 말해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성경을 비신화적으로 풀려고 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믿는 신화 같은 이야기를 성경에서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탄생 전에서 존재했다는 것이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그의 기적들, 대속제물로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마지막 심판 등을 성경에서 없애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을 다 없앤 후 주장하기를, 이들 중 그 어떤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이 신령한 부분에 있어서, 또 실질적으로 사실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당신이 성경이 읽으면서 등골이 오싹하게 할 때만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가득 차 있다면, 왜 내가 진리를 찾기 위해서 성경을 찾겠는가? 내 생각에는 만약 하나님이 내가 성경의 속성을 믿는 것을 원하신다면 역사적, 사실적인 성경의 속성이 신령한 진리를 입증하도록 했을 것이다.

어떤 의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감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류가 없는 성경을 주셨다는 기적을 믿는 것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오류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오류 없는 인간의 말을 찾아서 믿게 하시는 더 큰 기적을 하나님이 매일 행하신다고 믿는다. 실존주의 운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쏘렌 커크가드(Soren Kierkegaard)는 “당신에게 유익한 진리만이 진리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과연 어떻게 잘못된 책을 통해서 신령하고 올바른 경험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만약 성경의 어떤 부분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성경의 영적인 주장과 진술을 믿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요한복음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하셨다. 진리는 진리이고, 단지 어떤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고 결정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리가 되지는 않는다.

넷째, 성경은 저자가 기계적으로 받아 쓴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보수적인 근본주의 학자들이 성경이 일종의 기계적인 받아쓰기 방법으로 기록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을 비웃는다. 성경을 기록한 이들은 저자가 아닌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영적 기계 같은 기자이며 하나님이 그들의 귀에 하신 말씀을 이들이 그저 받아 적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렇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이런 기계적으로 받아썼다는 논리에 대해 반대하는 주요한 근거는 성경의 각 책마다 성경 기자의 인격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각 책은 특성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각기 다르다. 각 저자들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받아쓰는 방법으로 진리를 우리에게 주실 수도 있었다. 사실, 사람을 이용해야 했던 것도 아니다. (마치 몰몬교도들이 몰몬경을 받았다고 하는 것처럼) 금으로 된 판에 말씀을 새겨 하늘에서 떨어지게 할 수도 있었다.

나도 하나님이 왜 사람을 이용하셨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스타일이 있고 언어도 다르며 어휘도 다르다. 저자마다 각각 다른 독특한 성격이 드러나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종이에 옮기며 느꼈던 감정도 우리는 느낄 수가 있다.

그래도 우리에겐 질문이 있다. 어떻게 성경이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람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이 복잡한 질문의 답변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바울과 베드로 등의 성경 저자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할 인물들의 인격을 형성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들을 만드신 것이다. 그들의 유전과 환경을 조절하셨던 것이다. 그들의 삶을 조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와 의지를 허락하셨고,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들을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었을 때 그들의 자유의지와 언어의 선택을 지도하셨고,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진리를 제시하셨고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그들의 삶과 인격, 어휘, 감정 등을 통해서 원하시는 말씀을 고르신 것이다. 그 말씀은 이 사람들의 언어였지만, 실은 그들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서 틀이 잡혔기에 그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고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 기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양쪽 다 맞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렇게 네 가지 그릇된 감동을 살펴 보았다. 그럼, 올바른 견해는 무엇인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음 시간에는 감동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 볼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존 맥아더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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