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하 선교사(인도)
276호 / 나눔&나눔
불신자가 세상에 더 많다는 사실을 초등학교 때 깨닫고 당황스러웠을 정도로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또 많은 교회 친구들이 음란물을 봤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외로움을 느꼈지만 실제로는 자신도 전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존재적 절망을 경험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한 걸음씩 순종한 원정하 선교사가 고백하는 헌신과 순종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인도 뭄바이에서 사역하고 있는 원정하 선교사입니다. 2012년 봄, 만 29세의 나이로 목사 안수와 선교사 파송을 받고 지금까지 11년째 이 땅을 섬기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 청년 시절에 인도로 가셨군요. 특별히 인도를 선교지로 선택하게 된 배경이 있으신가요?
“먼저 신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를 해야 자연스럽게 나올 것 같습니다. 사실 신학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애타게 기대했던 모습의 캠퍼스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척 실망했어요. 그 덕분에 여러 가지 슬픔으로 걸으면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 신학교 1학년 첫 학기를 마치자마자, 예수전도단 DTS(제자훈련학교)를 받으러 인도 델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선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은 있어도 인도 선교사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선교사가 되고자 결심한 계기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었기 때문에 아프리카나, 비슷한 열대의 푸르른 어딘가로 가게 될 줄 알았지요.”
신학교 캠퍼스 생활에 실망, 신앙 훈련 위해 인도행
– 그렇게 해서 먼저 인도를 경험하게 되셨군요.
“인도 생활, 단 6개월 만에 17kg가 저절로 감량될 정도로 고생을 했어요. 그 경험 때문에 다시는 인도에 가고 싶지 않더군요. 바로 다음 해에는 교회 청년부와 함께 말레이시아 단기선교 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서는 어릴 적부터 꿈꾸었던 아름다운 정글의 부락 마을들에서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역을 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제 마음에는 한 가지 부담이 있었습니다. ‘내가 선호하는 곳으로 가야 하나, 하나님께서 더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 곳으로 가야 하나….’ 하는 고민이었지요. 결국 부르신다면, 그 곳이 제가 싫어하는 곳이어도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 청년의 순전함이 돋보이는 그런 결정이군요.
“그러던 중 예수전도단 대학사역에서 ‘비전그룹’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매년 겨울 한 달씩의 비전그룹 별로 단기선교팀들이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미 1학년 때 인도를 충분히 보았으니 학년마다 남미, 동유럽, 아프리카를 가보려고 했어요.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인도를 6개월이나 다녀온 대학생은 흔치 않았기에 저는 ‘인도 비전그룹’의 강력한 콜링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인도를 굳이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어도 인도에서는 약간의 경험치가 있으니 선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마지못해 순종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주님, 대학생 시절에 여러 나라 구경할 권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인도 비전그룹에 들어와서 겨울마다 인도만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쁘게 받아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다섯 해 연속으로 한 달씩 예수전도단 인도 단기선교팀을 섬겼고, 그것과 별개로 하나님께서는 여름 방학 등을 통해 다른 나라들도 많이 돌아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 주님이 인도 선교사를 만들기 위해 준비 훈련을 많이 받게 하셨네요.
“그렇게 열심히 단기선교를 다니던 2003년의 어느 날 저는 팀원들에게 “만약 내 삶을 통해 10만 명이 구원받는다면, 나는 심지어 인도 선교사로도 헌신할 수 있어!”라고 나누었습니다. 아직 정확하게 인도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즈음에는 상당한 담대함과 소속감을 느끼며 인도 비전그룹에 충성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기도 속의 10만은 100만이 되고, 1000만이 되고, 1억이 되고, 10억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물론 주님 뜻이었겠지만 김종두 화백이 그린 윌리엄 캐리 선교사의 만화 전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결코 해피엔딩이라 볼 수 없는 그 깊은 고독과 실패의 나날들, 떠나가는 동역자들, 깨어지는 가족들… 그 가운데서도 인도 선교를 놓지 않았던 대선배의 모습은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누리는 낭만과 희열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겁게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거기에 윌리엄 캐리 시절부터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니 사도 도마의 때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요원하기 짝이 없는 인도의 복음화. 거기에 내 삶까지 갈아 넣어봤자 대세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대륙의 거대함. 그런 중에, 내 삶을 통해 10만이 아니라 1000명, 100명, 아니 단 한 명만 구원을 받게 되어도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지, 동역자가 없고 내 삶의 마지막 날까지 대부흥을 보지 못하더라도 과연 인도 선교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정체성이 완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저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래의 인도 선교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 생활 및 신학대학원, 교단의 목사 안수 및 선교사 훈련 코스를 마친 후, 저는 진짜로 인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윌리엄 캐리 선교사의 삶 통해 인도 선교사 결정
– 모태신앙으로 성장하며 믿음에 의심이나 회의를 가진 적이 있으신가요?
“제가 한국인인 것, 혹은 인간인 것에 대해 의심이나 회의를 가진 적이 없듯, 모태신앙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큰 의심과 회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매년 성경을 일독씩 해 가며 새벽기도를 다니고, 최초의 어린이 큐티 잡지 ‘예수님이 좋아요’를 창간호부터 하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다만,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아득함을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 알고 보니 교회를 안 다니는 어린이가 나 같은 아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중학교 때 교회를 다닌다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성경을 일독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등학교 때 거의 모든 교회 친구들이 모여서 포르노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등등…. 그런 순간들에 엄청난 외로움을 느끼고, 통곡까지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큐티 잡지 예화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신앙이 좋은 가운데 주변에서 사랑도 받는 매력적인 아이가 되기는커녕, 평범한 우등생도 되지 못하고 친구들을 많이 전도하지도 못하는 제 자신이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신학교에 가면 더이상 외롭지 않고, 또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게 될 거야.’라는 기대를 갖고 버텨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 순서가 바뀐 느낌이 있지만 신학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게 된 동기가 있으신가요?
“어차피 목회자로 서원했고, 또 선교사로 제 삶을 드렸기에 신학교를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연한 마음으로 평안하게, 아버지가 나오셨고 언젠가 내 자녀 손자들도 들어갈 것으로 생각하며 감리교 신학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때가 2001년이었지요.”
– 나실인처럼 성장하셨군요. 선교사로서 사는 삶에 어떤 은혜가 있으신지요.
“지난 11년 간의 은혜의 에피소드를 나누자면 한정이 없지만, 다만 ‘인도’ 사역이 다른 사역들에 비해 특별한 은혜를 받는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지로서의 인도의 현 상황 때문입니다. 일단 인도는 세계 9위의 기독교 박해 국가입니다. 인도보다 박해 순위가 높은 여덟 나라들 – 아프가니스탄, 북한, 소말리아 등 -은 대부분 선교사회나 제대로 된 자국 교단이 구성되기 힘들 정도의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단기선교팀들도 방문하기 힘들구요. 그런 곳들에서 비밀리에, 충성되게 임지를 지키시는 분들은 정말로 존경스러운 분들이십니다. 하지만 인도는 가장 강력한 전장인 것에 비해 나름대로 빈틈이 많은 곳입니다. 한인 선교사회, 현지 교단과 목회자들, 현지 선교단체들, 현지 기독 학교들, 개인 전도자들, 한국 단기선교팀들 역시 곳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요. 인도보다 선교하기 어려운 나라들이 적진 내부라면, 인도는 아군의 전선과 적군의 전선이 맞부딪히는 최전선이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렇기에 정말로 ‘역동성 가득한’ 사역과 현장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됩니다.”
선교 현장은 역동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 요즘 선교사 헌신자 수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선교사를 희망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조언을 주신다면?
“먼저,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조언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시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결단을 늦추며 슬픈 엇갈림의 초침이 흐르는 만큼, 구원받을 수 있었던 수많은 영혼들은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선교사가 되시면, 높은 확률로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은 심장이 검에 찔리는 듯한 상처와 아픔들을 통과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보상을 받으실 것이고 현지의 잃어버린 영혼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의 적성과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의 행복을 위해 삶을 던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강력한 초청이네요. 끝으로 기도 제목을 나눠주세요.
“제가 사역하는 도시 ‘뭄바이’는 인구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데, 선교사가 단지 9가정뿐입니다. 게다가 모든 선교사님들의 평균 연세는 60이 넘습니다. 제가 평균 나이를 많이 내렸음에도 그렇습니다. 더 많은 선교사님들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헌신자들이 필요합니다. 인도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님을 볼 수 있도록, 더 많은 주님의 군사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인도의 각 언어로 만화 전도책자 및 복음 애니메이션 더빙 사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순적한, 그리고 꾸준하고 성실한 사역 속에 마침내 복음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퍼져나갈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복음기도신문]
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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