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사촌동생은 고모의 등에 업힌 채 굶주려 죽었다”

re_113_7_2 north kor‘연어의 꿈’(2)

1994년 김일성 사후 고난의 행군이 선포되고, 북한은 배급이 끊어졌다. 가정해체와 거리를 떠도는 꽃제비 청소년들의 행렬이 줄을 지었다. 그렇게 가족을 잃은 한 북한 청소년이 탈북해서 하나님을 만나, 이제는 북한의 복음화를 꿈꾸고 있다. 그 내용을 담은 ‘연어의 꿈’(강디모데, 예영B&P刊, 2013)을 요약, 소개한다.<편집자>

1996년 고모부들이 광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없는 양식에 물만 더 붓고 끓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고모의 가족들과 같이 11명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국수 한 사리를 넣고 끓여도 민둥한 물뿐이었다. 돌도 되지 않은 고모의 아이는 젖이 나오지 않으니 계속 울기만 했다.

어느 날 도적질을 하려고 시장에 나가 맴돌다 한 할머니의 사탕을 한 주먹 훔쳐 도망쳤다. “이 놈아 손자도 못주고 나왔는데…” 사탕 한 알을 입에 넣고 나머진 도로 던졌다. 귓가에서 사촌동생의 울음소리가 맴돌았지만 누구를 생각할 처지가 못 되었다. 며칠 후 아기는 고모의 등에 업힌 채 굶주려 죽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나는 황해도 외삼촌 집에 식량을 구하러 떠났다. 열흘을 걸어 도착했다.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콩청대(밭에 있는 콩을 잘라 놓고 불을 지펴 집어 먹는 것)를 해먹다 불이 번져 집 네 채를 태웠다.

산으로 도망쳤다가 저녁 무렵 내려왔는데 삼촌의 몽둥이 몇 대를 맞고 기절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하라며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옥수수 한 배낭을 메고 도망치듯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콩청대를 해먹다 집을 태우기도

어머니는 삼촌 집에서 가져온 식량으로 빵을 만들어 시장에 들고 나갔다.

“엄마 배고파요. 빵 좀 주세요.”

“안 돼. 하나라도 먹으면 옥수수가루를 살 수 없어.”

어머니는 뒤에서 따라오는 내게 오지마라고 돌을 던지다 우시면서 겨우 빵 반쪽을 끊어 주셨다. 시장에 앉아 빵을 팔고 있는데 갑자기 꽃제비들이 덮쳐 순식간에 빵을 몽땅 도적질해 갔다. “야 이 새끼들아 아들도 못 주고 나왔는데…” 어머니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날 아버지는 빈손으로 돌아온 어머니를 사정없이 때렸다.

가난은 친척도 남이 되게 했다. 며칠을 굶고 있을 때 어머니는 이모 집에 나를 보냈다. 그 뜻은 가서 ‘먹고’ 오라는 것이다. 다행히 식사 시간에 도착해서 며칠 만에 옥수수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모부는 우리도 식량이 없다며 집에 가라고 했다. 산마늘이라도 뜯어가려 산에 가는데, 이모부는 기차가 하루 한번 다니는 데 지금 못가면 어디서 또 먹고 자냐면서 2미터 되는 콩대를 뽑아 때리며 나를 쫓아내셨다.

어느 날은 어머니와 기찻길을 따라 쑥을 뜯다가 외할머니집 근처까지 가게 되어 물을 마시러 들어갔다. 부엌에 옥수수밥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사정을 하셨다. “엄마, 옥수수밥 한 그릇 좀 먹기요. 철이랑 나눠 먹고 가려고요.” 할머니는 화를 내시면서 물만 먹고 그냥 가라고 했다.

북한은 학교에 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못, 유리, 장작, 석회 등등 다양했다. 없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사서라도 내라고 했다. 돈이 없는 나는 친구들과 한 시간 넘게 걸어서 석회공장까지 가서 도적질을 해서 냈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도적질한 기억은 셀 수도 없다. 누군들 도적놈이 되고 싶었을까? 하지만 없는 것을 내라고 강요하니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 북한이 말하는 자력갱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가난은 친척도 남이 되게 한다

태어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가정에서도 그냥 각자 살았을 뿐이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때렸다. 늘 아버지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아버지와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법보다 주먹이 우선인 사회에서 지켜줄 보호자가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험한 세상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하며 희망을 찾아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두 분은 탈북하기까지 반복되는 폭력의 일상에서도 ‘함께’ 사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부엌에서 소리 없이 욕을 퍼부으면서도 나를 안고는 미안해하셨다. “미안하다. 엄마가 못나서…” 가난한 사회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계속> [GNPNEWS]

강디모데
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5번의 새아버지를 만나 살던 중 식량난으로 탈북, 중국에서 선교사를 만나 신앙을 갖게 됐다. 현재 대학 재학 중이며 꿈은 자신과 같은 고아(꽃제비)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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