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70)
Q-7. 무슬림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A-7: 한 문장으로 말하면, 무슬림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는 무슬림들을 가리켜 한 마디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지금 무슬림들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알라’를 단일 신으로 믿으면서도 무함마드를 알라가 보낸 최후의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같은 신앙 외에도 매일의 예배, 매년 라마단 기간이 되면 어김없는 단식, 거기에다 자기들의 죄를 위해 매년 희생제물을 드리는 공통의 행위가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꾸란’을 읽지 않은 무슬림들이 적지 않고, 이슬람 기본 교리를 제대로 지키지도 않으며 살아가는 무슬림들이 허다하다. 그런데도, 그들을 과연 무슬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들은 자기들이 무슬림이라고 말한다. 비록, 꾸란을 전혀 읽지 않아도, 메카를 향해 기도하지 않아도, 라마단 기간에 단식하지 않아도 저들은 여전히 무슬림이다. 당신이 그들을 향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려 한다면, 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향해 비판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신경전을 펼치기 마련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인가?
만약, 무슬림들이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인가를 물어온다면, 우리는 뭐라고 말해 줄 것인가? 어떤 이들은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의 수는 지금보다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며, 헌금하지 않아도 여전히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무슬림들도 이와 큰 차이가 없어야 한다.
잘 알다시피,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헬라어 ‘크리스티아누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작은 그리스도’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로부터 소명 받은 자,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이며,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자들을 의미한다.
에코 체임버(Echo Chamber)에 갇힌 무슬림들
오늘날 많은 무슬림은 자기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꾸란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이슬람 절기에 따라 계속되는 라마단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매년 희생절 행사를 통해 자기들이 지은 죄에 대해 왜 속죄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의 신에게 ‘왜?’라고 질문하고 싶어도 감히 그러지 못한 채 무조건적 복종과 충성을 다짐하는 무슬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전혀 선택의 여지 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이슬람 신앙은 마치 ‘에코 체임버(Echo Chamber)’ 같은 환경을 가진 사회와 문화 안에서 고정 잣대와 편견의 틀 안에서만 밖을 내다보려고 한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평생 편견으로만 살았던 무슬림들이 지금 자기들 스스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저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이며, 이를 위해서 우리 한국교회를 사용하고 계신다.
Q-8. 무슬림들은 정말 무섭고 위험한 사람들인가?
A-8. 절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무슬림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비 기독교인 모두를 같은 식으로 무서워하고 위험한 사람들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한국교회는 유난히 무슬림들을 향해서만 이런 생각이 지배적일까? 게다가, 지금 일부 한국교회 안에 퍼져있는 이슬람을 향한 ‘포비아’ 생각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이슬람과 무슬림을 떼어내서 생각할 수 없음에도, 지금 한국교회 안에 팽배한, ‘이슬람은 경계하지만, 무슬림들은 사랑하자!’라는 구호는 이치에 맞는 말인가? 이슬람을 철저하게 경계하자고 말하면서 이슬람교 안에서 살아가는 무슬림들만 쏙 뽑아서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최근 필자의 동료 선교사 한 분이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이슬람 대책 위원회’라는 말을 아예 없애고, 대신에 ‘무슬림 사랑 위원회’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호소력이 있으며, 매우 논리적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은 타인을 향해 철저히 희생적이고도 무조건적이다. 만약, 정의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폭력, 비판, 적대감이 용납된다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서야 할 자리는 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서구 사회에 형성된 무슬림 ‘게토’
지금 우리 국민 일부는 국내에 유입되는 무슬림들을 향해 서구 무슬림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게토’가 국내에도 만들어질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나라도 서구 사회처럼 무슬림들 때문에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갈등의 가능성을 예상하며 염려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러나, 서구에 형성된 무슬림 ‘게토는 서구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즉, 서구 무슬림 집단화로 인한 사회 불안 조성의 책임은 그 땅에 들어온 무슬림들을 멀리하고, 이웃으로 맞아주기를 거부한 서구 사람에게 있다.
만약, 기독교 문화와 사회로 이루어진 서구 사회가 자기들의 땅을 밟은 무슬림들을 향해 먼저 다가가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했더라면, 그 땅에 무슬림들의 게토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구 사람은 자기들과 다르게 보이는 무슬림들을 피해 지나갔고, 다가가지 않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았기에 그곳 무슬림들은 자연스럽게 소외되었다, 그로부터 생존본능 속에서 그들의 ‘게토’를 만들어서 문을 꽉 닫은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만약 서구에서처럼 무슬림 게토 사회가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 사람이 국내에 들어와 도움이 필요한 이주민, 근로자, 또는 난민으로서의 무슬림들을 냉대와 멸시로 멀리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갖기를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일에 우리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부담과 책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하나의 반면교사(反面敎師)
이제, 우리는 무슬림 게토가 만들어진 오늘의 서구 사회를 바라보면서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금 우리 교회는 30만 명에 가까운 국내 무슬림을 포함해서 250여만 명의 외국인을 이웃으로 두고 살아가기 시작한 시점에 서 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불쌍히 여기는’ 이웃 사랑으로 다가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것인지에 관한 중대한 결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국내로 이미 들어온 저들을 향해 잘 알지도 못하는 편견과 오해 속에서 막연한 두려움으로 저들을 피하고 지나가다 국내에 무슬림들의 ‘게토’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저들 곁으로 다가가서 저들이 자기들의 ‘게토’를 만들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도록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그들을 품고 함께 살아가면서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할 것인가?
사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무슬림들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저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는 이웃 사랑으로 다가가기를 포기한 우리의 마음이다. 또한,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이슬람이 아니라, 강퍅한 마음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손수 보여주신 사랑으로 대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무슬림 전도의 벽이 너무 두껍고, 이슬람의 문의 굳게 닫혔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정말 두꺼웠고 닫힌 것은 그들을 향해 주님의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며 다가가기를 거부한 우리 마음과 생각의 문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신다(딤후 1:7). 그러니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으로 저들을 대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본분이요, 사명이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주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물론, 테러를 일삼는 일부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은 존재한다. 하지만 무섭다고, 위험하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보류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딤후 4:2)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선교로의 지상 대명령(마 28:18~20)을 왜곡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모든 무슬림을 위해서도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그들도 복음을 들어야 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틀림없이, 이 세상 어딘가에 무서운 무슬림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국내로 들어와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 살아가는 저들을 굳이 두려워하거나 피할 필요는 없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우리 주님의 뜻이다. 만약, 무슬림들을 위험하다고 경계하고 피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이 땅으로 보내주신 주님의 선교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것이 맞느냐 저것이 맞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시간을 소모하기보다는 언제 다시 그들의 땅으로 갈지 모르는 무슬림 이웃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 물론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운 접근 방법을 함께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국립 이스탄불대 역사학과 석사, 박사,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터키어권선교회(FOT)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전방개척선교(KJFM)’ 저널 편집인, 아신대(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1)무슬림 이해하기』 / (2022, 라비사북스). 『벌거벗은 세계사(경제편)』 공저/ (2023, 교보문고), 『밖에서 본 이슬람, (2)이슬람 이해하기(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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