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마십시오…

선지자 호세아는 처음부터 결론적인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호 1:2)
그리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는 절대로 내 자식이 아니다. 외면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 내 자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달라진 주님의 태도 변화의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마치 횡설수설하시는 듯한 하나님의 말씀을 안고 2장부터 긴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 사람 몸뚱이가 썩었대” 이 말을 귀로 듣는 것과 실제 썩은 현장을 경험할 때 받게 되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썩은 거야? 이 지경이었어?” 한숨과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백문일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만번 되짚어 물어도 결론은 오직 하나라는 뜻입니다. 복음에 대해 동의하는 이에게 묻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인류를 구원할 방법은 십자가뿐입니까? 명목주의, 세속주의 늪에서 빠져나갈 힘이 없다고 생각 될 때 오직 십자가 복음이면 충분합니까? 복음주의와 무관한 사람이야 논외로 친다고 해도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 안에서도 넘어지고 무너질 뿐 아니라 회개의 빛도 보이지 않습니다. 맥 빠진 복음주의로 인해 교회는 스스로 넘어지고, 기독교를 집어 삼킬 것 같은 기세로 이슬람세력은 거세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연 30년이 지난 이후에 교회는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때에도 백문일답 입니다. 십자가 복음이면 되는 것입니다. ‘낫지 않은 병에 약이 많다’는 말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처방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어떤 대안도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 십자가의 복음만이 답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서 잡은 복음뿐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믿는 것, 행하는 것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이 역사의 분수령이 나 하나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30년 전인 80년대의 한국 기독교. 이미 사회의 소외계층이 모이는 주변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존재는 온 사회에 확대돼 갔습니다. 70년대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통해 100만 집회로 더욱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기득권층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 기독교의 입장이 바뀌었을 때의 역사적 교훈을 기억합시다. 무엇인가를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도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기득권을 가졌을 때 사람의 중심이 다뤄집니다.
30년 전 한국의 기독교에는 부분적 외침만 있었습니다. ‘외적인 성장만이 전부가 아니다. 제자를 세워야 한다. 교회가 순결을 찾아야 한다’ 등 그러나 그 외침조차 무시당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바랬습니까? 온통 큰 것, 번영하는 것,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믿고 바라는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며 한 세대를 보낸 제게 그 때의 분위기. 그 때의 간증. 그 때의 가치관을 돌이켜보면 오늘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그 씨앗을 뿌렸던 것입니다. 30년 전에 깨달았다면… 복음의 본질에 더 다가갔더라면, 진리에 관심을 두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제 장탄식을 멈추고 앞으로의 30년 후를 내다 봅시다.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30년 후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인지 생각해봐야합니다. 오늘 우리의 행동이 곧 내일을 얻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대로 나아간다면… 오늘 결단하지 않고, 미적거린다면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앞에 정직하게 서지 않으면, 심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우리 손끝에 달려 있습니다. 기관차의 객차는 선택된 레일을 따라 들어옵니다.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 합니까? 지금이 바로 여호와께로 돌이킬 때입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진리에 전부로 결단할 때입니다.
호세아의 메시지가 외쳐 칠 때 이스라엘은 경제력을 가장 자랑하던 때였습니다. 종교, 경제, 군사 어느 면으로도 망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번영 외에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침묵했습니다. 이 때 외쳐야 할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이 때 결정되었습니다.
예언은 언제 선포되어야 합니까? 망조가 들 때 외쳐져야 합니다. 지금은 결단해야 할 때 입니다. 미혹과 혼돈을 비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단순한 마음, 순결한 마음 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곳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호 5:4)
복음이 어려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마음이 음란하기 때문에 돌이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믿는 바를 정확히 정리해야 합니다.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이 열조에게 돌아가매 그 후 세대는 여호와도 그 행한 일도 알지 못하더라(삿 2:10)’ 다음 세대가 복음이 뭔지 모른 채 무지하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복음 앞에 서 볼 시간도 없는 오로지 사역에만 빠져있는 엄마 아빠 밑에 사는 자녀들입니다.
D.L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역할 때는 복음대로 살라고 전하면 되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복음에 대해 무지한 세대가 나타날 것입니다. ‘복음을 가르쳐야 하는 세대’ 우리가 오늘 무언가 하지 않고 돌아서면 남은 세대는 어디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흘러가면 결과는 불을 보듯 자명합니다. 세계교회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한국교회, GCOWE95대회에서 세계교회가 열광했던 한국교회는 이제 선교의 선발주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 크지도 못한 채 애를 낳아야하는 형편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를 정리하여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알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도, 정직한 자에게 생명을 주는 영원한 진리의 터, 이 복음을 고백합시다. “나는 고멜이었지만, 지금 나는 호세아 입니다.” 우리의 행동강령을 정해놓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갑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가도 복음은 영원합니다. 오늘날 신앙성명이 필요합니다. 과거 신앙이 혼돈을 겪을 때 믿음의 조상들은 사도신경을 선포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거세게 일어날 때 1974년 로잔회의에서는 믿는 바를 정리한 로잔언약을 선포했습니다. 복음을 정리했고 기도에 불을 일으켜 선교를 활성화했습니다.
역사상 이미 폐색이 짙어진 1910년대의 조선은 3.1 독립선언을 선포하였고 자주 국민임을 선포 했었습니다. 때가 차서 독립을 맞았듯이,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 백성입니다. 아직도 오지 않은 해방의 그 날을 바라보며 이 시대를 향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 메시지 정리

<순회선교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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