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순종하다보니 오직 이 길만 보였어요”

주님만 따르는 정학정.정조이 교육선교사

미국에서 누리던 안락한 삶을 모두 내려놓고 충남 서산의 산골짜기 기독학교 헤브론원형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학정, 정조이 교육선교사 부부를 만났다. 이들의 삶 가운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님의 손길이 묻어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 미국에는 언제 가셨나요?

정학정(이하 학): “1985년 제 나이 스물세 살 때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어요. 당시 한국에서 저는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채플시간에 들어가지 않아 권고휴학을 당할 만큼 매우 어두운 시기였어요. 교회에서 성가대 연습을 마치면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러 갈 정도로 신앙과는 무관한 사람이었어요. 그렇지만 제 영혼에 뭔지 모를 갈증이 있었어요. 그러는 사이 아버지께서 먼저 미국에 건너가셨고, 3년 뒤 어머니와 저와 제 동생도 함께 건너가게 됐어요. 작년이 미국에서 산 지 30년째 되는 해였는데 생각지 못하게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네요.”

정조이(이하 조): “저는 1986년 친척 분들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아버지 형제 분들이 다 계셨거든요. 그 때 제가 가족 중 유일하게 미성년자여서 이민을 결정하는 열쇠 역할을 한 것 같아요. 부모님도 연세가 있으셔서 제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용기 있게 가실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저도 별다른 반감 없이 가족의 결정에 따르게 되었어요.”

가족과 함께 80년대 미국 이민

– 그러면 두 분이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건가요?
조: “미국에 간지 한 8년 정도 되었을 때 교회 청년부에서 처음 만났어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난 건 기적이에요. 그 넓은 미국에서도 남편은 중부에, 저는 동부에 있었으니까요. 사실 만날 확률이 거의 없었죠.”

학: “그즈음 저희 집은 재정적으로 완전히 몰락해 있었어요. 아버지께서 뉴욕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으시다가 결국 부모님 모두 한국으로 되돌아가신 상태였어요. 정말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공항에 부모님을 모셔다드리고 나오는 길에 주차비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때 문득 ‘이러다 내가 홈리스(homeless, 노숙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도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그만큼 미국에서 사는 것이 좋았어요. 그러다가 1992년에 교회에서 아내를 만났어요.”

– 미국에서 신앙생활은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조: “미국에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신앙을 가질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일단 신앙적인 배경이 없었고, 어머니는 불교신자셨거든요. 한 집안에 종교가 나뉘면 안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미국에 갔을 때 어머니께서 어린 제가 믿기엔 불교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사촌들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라고 하셨죠. 정말 놀라운 주님의 은혜였어요.(웃음) 그렇게 신앙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던 저에게 교회생활이 시작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공부 하고, 세례도 받고, 교회봉사도 하면서 ‘믿음 있다’ 생각하고 살았어요.”

학: “주님의 인도하심은 놀라워요. 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다가 결혼한 이후에 USC영화과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학교가 있는 LA로 이사를 갔는데, 그때 출석하게 된 교회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때는 하나님께서 저를 영화쪽으로 부르셨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 다큐멘터리 영화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게 미국 감독협회 다큐멘터리 아시안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미국 공영방송에서 방영도 되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교묘하게 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일이었는데 당시는 몰랐죠. 하나님의 응답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몇 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게 하셨어요.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분과 생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롭게 시작한 일이 부동산 일이었죠.”

–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이네요.

학: “지금 돌이켜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일 그 과정 중에 세상적인 관점에서 성공했다면 그 위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살았겠죠. 그러면 저의 삶에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기는 쉽지 않았을 거에요. 결국 세상적인 성공이 복음의 영광을 누리는 삶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조: “남편이 영화감독으로 할리우드를 향해 막 달려가려고 할 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말씀을 붙들고 계속 기도했어요. 말하자면 할리우드가 ‘산지’였죠. 그래서 큰 아들 이름도 갈렙이라고 지었구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 지금은 그 아들이 열방을 산지로 취하는 다음세대 선교사가 되었어요.”

하나님의 인도로 신앙생활 시작

– 영화의 꿈을 접고 난 후 주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주셨나요?
학: “생활은 굉장히 안정 되어갔어요. 아내가 공인회계사였고 저도 부동산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부족함 없이 살았어요. 그때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LA동부 쪽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저희 가정이 그곳으로 파송 받아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작은 개척교회를 섬기는 일이 너무 즐거웠어요. 회사 일보다 더 열심히 섬겼어요. 하루에 두세 번씩 교회로 출근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것도 몇 년이 지나자 한계에 부딪치고 점점 지쳐가더군요. 자꾸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고 마음이 늘 공허했어요. 거룩해지고 싶은 제 안의 갈망과는 다르게 계속 음란한 생각들 때문에 괴로웠어요.”

– 위기 상황을 만나신 거군요.

학: “그런 내적갈등을 겪으면서도 새벽예배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어요.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출장을 가면 새벽 2시에 일어나 2시간 운전해서 새벽예배 드리고 다시 일하러 갈 정도였죠. 존재적으로 거룩해질 수 없는 나를 그런 식으로라도 거룩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성도들은 저를 모두 칭찬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거룩하지 않다는 괴리감 때문에 너무 괴로웠어요. 제 안에 있는 죄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떡할지 걱정이 더 커지기만 했죠. 그런 상황들이 계속 겹치면서 목마름이 극에 달했을 때 교회 목사님의 추천으로 가게 된 훈련과정에서 십자가 복음을 듣게 됐어요.”

– 어떤 변화가 있으셨나요?

조: “남편이 한 신앙훈련 과정을 통해 복음 앞에 선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 4시에 자다가 일어나서 한 시간씩 열방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6개월 동안 그런 모습을 보니까 너무 궁금해졌어요. 다른 기도도 아니고 열방을 위해서 기도를 하니까요. 저도 결국엔 남편을 변화시킨 복음 앞에 서게 되었죠. 복음 앞에 서보니 저는 죽을 죄인이었고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자였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도, 거룩해질 수도 없는 제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살았다는 거예요. 십자가가 비로소 제게 기쁜 소식이 되었어요.”

학: “복음 앞에 선 이후 제 삶의 가장 큰 변화는 성경이 너무 재밌어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선교에 대해 눈이 열렸어요. 그전까지 여러 번의 선교경험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선교는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주위에서 노년에 인생을 마무리하거나 뭔가 잘 안될 때 도피처처럼 선교지에 가는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반감도 컸어요.

그러나 주1회 참여하는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제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주님께서 복음 안에서 제 삶의 모든 주도권을 취하셨고 결국 제가 끝까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선교사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게 하셨어요.”

조: “저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말씀을 너무 정확하게 보여주셔서 한 걸음 두 걸음 따라가게 하셨어요. 특별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 달리는 것을 경험하게 하셨어요. 회사에 휴가를 내고 2주 동안 아웃리치를 간 일이 그랬어요. 미국에서 그것도 가장 바쁜 시기에 2주 동안 휴가를 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죠. 게다가 그동안 한 번도 일을 쉰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받았던 그 선교훈련을 저도 받으면서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라는 말씀을 허락해 주셨어요.

그 말씀을 받으면서 회사에서 허락이 안 되면 그냥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한번 물어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휴가 신청을 했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휴가 처리가 되고 그 기간 동안 해야 할 일들이 다른 직원들에게 분배되었어요. 기적이었죠. 말씀을 따라간다는 것이 이런 것임을 배우게 되었어요. 그렇게 말씀을 따라가다보니 지금 여기 있게 된 것 같아요.”

거룩함에 대한 목마름으로 십자가복음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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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들 갈렙(우), 가브리엘(좌)과 함께

– 그러면 교육선교사로는 어떻게 헌신하시게 되셨나요?

학: “미주에서 열렸던 청소년복음캠프의 섬김이로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복음 없이 이곳에 사는 다음세대들의 상황을 보게 해 주셨어요. 한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아닌 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복음을 가르치는 학교가 너무나 필요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죠. 그러다가 다음세대 선교사를 양성한다는 헤브론원형학교 소식을 듣게 됐어요. 큰 아들 입학 인터뷰를 하러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미국에도 이런 학교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 툭 튀어나왔어요.

그랬더니 교장선생님께서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저희 부부에게 번갈아가면서 6개월씩이라도 학교를 경험할 것을 권면해 주셨어요. 바로 그때, 제 내면 안에 ‘이거다!’하는 마음이 아주 강하게 들었어요. 선교사로 헌신하고 어디로 부르실지 기다리던 제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어요. 그 음성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6개월이 아니라 평생 헤브론원형학교에 종신 교육선교사로 제 삶을 드리게 되었어요.”

조 : “그 과정에서 집과 직장과 교회를 정리하는 일들이 참 만만치 않았는데요. 주위에 계셨던 선교사님들의 조언은 돌아갈 수 있는 어떤 여지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희도 주님 앞에 모든 것을 털고 그냥 한 걸음씩 말씀에 순종하자는 결론을 내렸죠. 한국에 들어올 때는 정말 다 버리고 가방 두 개씩만 가지고 들어왔어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은혜였지만요.”

– 정말 믿음으로 순종을 결정하셨군요. 끝으로 지금 믿음의 걸음을 걷고 있는 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조: “어떻게 보면 저희도 삶의 터전을 완전히 허무는 일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사람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오다보니 오직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는 고백밖에 할 게 없네요.”

학: “저는 잘 모르지만 ‘이런 과정 다음에 뭘 해보겠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왔다.’는 뭐 이런 전제가 없다보니까 너무 자유로워요. 내 모든 계획을 주님께 드리고 순종만 가지게 된 거니까요. 그러고보니 그전엔 왜 이걸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동안 ‘사역적인 헌신’만을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존재적인 헌신’을 드리게 된 거죠. 부르심은 선물이더라고요.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고요.”

[GNPNEWS]

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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