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들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이 땅에서 이주민을 섬기는 박성규 선교사(예승선교센터)

그리스도의 군사는 자기의 생활에 얽매임이 없다. 군더더기 없고 단정한 말과 인품, 개인사는 마치 브리핑을 하듯 간결했다. 하지만 사역과 이주민 형제들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할 말이 많은, 더 이상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남아있는 박성규 선교사를 만났다.

– 네팔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성결교 파송 선교사로 1997년부터 15년을 네팔에서 보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들어와 2014년 1월 안산에서 이주민을 위한 예승선교센터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3년 동안 네팔 이주민들을 섬겼습니다. 지난해 12월 이곳, 경기도 화성으로 옮겨 계속 이주민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 어떻게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셨는지요?

“저는 철저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막내 고모님이 유일하게 저를 데리고 교회를 다니셨는데, 시집을 가면서 ‘내가 떠나면 믿음의 대가 끊기니 장남인 네가 열심히 다녀라.’ 당부를 하셨어요. 순종하는 마음으로 토요일에는 학생예배, 주일에는 대예배에 나갔어요. 그러다 고1때 집회를 통해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케 하시는 은혜가 있었어요. 다음날 세상이 달라보였어요. 똑같은 하늘이고 보리밭인데 나를 위해 춤을 추는 듯 보였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알게 됐죠. 어린 나이에 갖게된 뜨거운 경험이었어요.”

고1 때 죄인임을 깨달아

–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군요.

“네. 그 후로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했어요. 친구가 담배를 권해도 죄를 안 지으려 거절했지요. 졸업 후 신학을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반대로 일반대학 국어교육과로 진학했습니다. 그래도 선교단체에서 성경공부하고, 전도회와 수련회를 하며 좋은 시간들을 보냈어요. 그때 민족복음화, 세계선교의 비전을 주셨어요. 마침 대학 3학년 때 ‘80 세계복음화대성회’가 열려 대전에서 올라와 여의도광장 집회에 참여하면서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그것이 제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됐습니다.”

– 바로 선교지로 나갈 준비를 하셨나요?

“중국을 품고 준비하는데, 아직 교류가 안 열렸을 때라 주변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뜨거운 마음이 한풀 꺾이고 졸업을 하니 현실이 보였습니다. 동생들도 있고, 부모님은 연로하시니 장남이라는 부담이 있었죠. 1984~1990년까지 7년 동안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결혼도 했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공허했습니다. 지금 보니 이중적 삶을 산 것 같아요. 주일에는 주님을 향해 살았지만 주중에는 퇴근 후 동료들과 어울리며 세상 것들을 함께 했죠. 기도의 자리에 가면 괴로웠습니다. 그러다 1990년에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신 사건이 있었어요.”

– 어떤 일이 있으셨나요?

“저는 6남매 중 장남이고 아내는 7남매의 장녀에요. 둘 다 인간적으로 볼 때 책임이 막중했죠.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에 학원을 열었는데 점점 확장이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다른 학원이 생기면서 수입이 줄고, 학원을 유지하려고 집사람이 빚을 내면서 감당이 힘들어졌어요. 신경을 쓰다 보니 위에 구멍이 3군데나 생겼고, 그 와중에 섬기던 교회가 분열되고 불까지 났습니다. 육체, 가정, 교회의 복잡한 일련의 과정이 90년도에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2~3개월 동안 산기도를 갔어요. 심령이 곤고하던 어느 날, ‘네가 내 길을 가면 너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내적인 음성을 주셨습니다. 전적인 순종을 결심하고 마음이 흔들릴까 봐 다음날 학교에 사표를 냈어요.”

– 오래 미루던 결단을 하셨네요.

“주님의 길을 간다는 것은 돈과 교사직, 세상적인 추구들을 내려놓고 신학을 해서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라 생각해 곧 신학대학원을 준비했습니다. 졸업 후 전도사로 7년을 사역했지만 39세에 또 진로에 대한 고민이 왔습니다. 선교사로 헌신했으니 일반목회에 대한 꿈은 없었지만, 한편으로 안전한 교회 청빙도 생각했죠. 다시 집중 기도를 했는데 선교사로 가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훈련을 받은 후 후보지였던 몇몇 나라로 아웃리치를 떠났습니다. 그때 한 호스텔에 갔어요. 그곳에선 극빈가정 어린이, 편부모 자녀, 고아 등 소외된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곳 아이들이 방문한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어린아이들이 손을 들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이 강하게 남았습니다. 선교지를 결정할 때 이 호스텔 아이들이 떠올랐고, 주님께 물었을 때 평안한 마음을 주셔서 1997년 12월 9일, 네팔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97년 선교지 네팔에 첫 발

– 네팔 사역은 어떠셨나요?

“도착한 다음날부터 2~3개월 동안 거의 매일 아이들과 괭이와 삽을 들고 땅을 파며 공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선배 목사님이 이곳에서 학교를 하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언어도 안 되는데 난감했지요. 그런데 다리 한쪽이 없는 소아마비 아이 럭침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아이였는데, 산 밑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럭침이 아침마다 힌두신에게 하는 기도를 안하겠다고 하니 담임선생님이 뺨을 때렸다고 했습니다. 럭침은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했지요. 마음이 아팠어요. 기독학교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선교국에서 오는 생활비 일부로 칠판을 짜고, 선배 선교사가 쓰던 강의실을 빌려 네팔에 간 지 4개월 만에 학교를 열었습니다. 1998년 4월 1일, 에버그린 스쿨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현지인 교사들이 있었는데 2/3는 크리스천, 1/3은 힌두 교사를 뽑았습니다. 신앙이 없어도 같이 예배드리고 기도했죠. 하지만 7년 동안 운영하던 학교는 지원 약속이 어긋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문을 닫았죠.”

– 우여곡절이 많으셨군요.

“하나님이 두 번째 일을 주셨어요. ‘호산나’라는 비정부기구(NGO)를 섬기는 일이었어요. 네팔 정부와 국제봉사단체가 함께 하는 사역이라 대정부 관계를 하면서 재정을 모금해야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강경 힌두교 신자들이 없는 일을 꾸며 정부에 투서도 하고, 폭파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어요. 매년 큰돈을 모금해 학교, 병원. 호스텔 사역을 했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기도 중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마음에 서서히 사역을 접었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키워야겠다는 마음에 2008년부터 목회자 훈련과 네팔의 가난한 기독 대학생 5명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했습니다. 그들이 네팔의 크리스천 리더로 세워지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그때 함께 생활했던 던바둘이라는 아이는 잘 자라서 지금 약사가 되어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다 2011년 더욱 복음으로 서는 또 한 번의 전환점을 주셨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던 둘째 아이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 아이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 일을 계기로 복음을 다시 한번 만났습니다.”

– 복음을 다시 만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교사직도 버리고 가난한 네팔로 가서 그들을 돕고, 목회자 훈련도 시키고, 아주 열심히 했는데 왜 하필 내 가정에 이런 일이 생기나….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2012년 1월, 일주일간 한 선교단체의 훈련과정을 통해 주님이 저의 의를 깨뜨려주셨어요.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지, 나는 희생하고 고생하면서 선교를 해왔어.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 것도 꽤 많아. 선망의 대상은 아니지만 부끄럽지 않은 선교사야.’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복음 앞에 다시 서보니 제 모습은 형편없었습니다. 훈련 기간 동안 듣게 된 ‘존재적 죄인’이라는 말이 나한테 실제로 적용될 말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한 것도 그 이면에 나를 위한 숨은 동기가 있었고, 자녀의 문제도 되짚어 보면 결국은 이기적인 제 욕심이 문제였죠.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나의 필요를 채워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정 안에 아픔이 있었지만 결국 주님은 그 어려움을 통해 주님께 눈을 돌리게 하시고, 나를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주님이 아니면 안 되는 자로 관점을 바꿔주셨습니다.”

– 그 후에는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나요?

“2012년 안식년은 주님이 제 마음을 격렬하게 다뤄주시는 시기였습니다. 한국에 나올 때만 해도 네팔 사역을 철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님은 한국에서 네팔 이주민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즈음 여러 만남과 사건들로 부담을 주셔서 한국에 남아 이주민 사역을 할 것인지, 네팔로 돌아갈 것인지 집중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네팔은 어떻게 보면 최상의 조건을 갖추어가고 있었죠. 호스텔에 양육하는 대학생들도 있었고, 공간을 개조해서 강당과 사택을 만들어 재정적인 어려움도 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은 또 다른 길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한국에서 네팔 이주민 만나

▶ 네팔 이주민과 함께

– 한국에서 이주민을 섬기는 사역을 시작하게 하셨군요.

“청주에서 3박 4일 동안 열린 말씀기도회에 참여했는데, 마지막 날 아침 빌레몬서 1장 15절 말씀을 주셨어요.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마음은 네팔에 있었지만 잠시 떠나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주셔서 그 자리에서 이주민을 위해 한국에서 사역할 것을 고백했습니다. 2014년 1월 11일, 안산에 예승선교센터를 열었습니다. ‘예승’은 ‘예수승리’, 네팔어로 ‘저이머시’입니다. 네팔 크리스천들의 인사죠. 한국에 있는 네팔 근로자, 유학생, 결혼을 위해 온 이주민들을 복음으로 양육하고 그들이 다시 네팔 교회를 일으키는 것을 꿈꿉니다.”

– 이주민 사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합니다.

“힌두교도들이다 보니 처음엔 복음보다 교제 위주로 만납니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은 한글을 배우고, 네팔 음식을 먹고, 자기의 필요를 채우려고 옵니다. 어느 정도 교제가 이루어졌을 때 복음을 나누면 양편으로 정확히 갈라지더군요. 육체의 필요를 구하던 사람들은 떠났고, 네팔에서 교회를 다녔거나 마음으로 관계가 이루어진 사람들은 꾸준히 나왔습니다. 대부분 노동자들이다 보니 병원이라고 전화가 오면 의사를 만나 통역해주고, 서류도 봐주고, 그 인연으로 센터에 와서 복음을 듣습니다. 이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이 제 안에 주시는 것은 인내예요. 주님의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사역입니다.”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

– 그렇게 복음을 받은 형제들이 있나요?

“2박 3일 동안 복음훈련과정을 진행했는데, 라주라는 형제가 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과 함께 이제 구원받은 자신은 선교적 존재라고 고백했습니다. 라주는 에버그린 스쿨의 어린 학생이었는데, 네팔에서 대학을 나와 한국에서 기독대학 박사과정 유학 중입니다. 그가 네팔에서 복음으로 영향을 주는 크리스천 리더가 되게 해달라고 아침마다 기도합니다. 디퍽이라는 형제도 있습니다. 야근하다 사고가 나 손가락 3개를 절단했어요. 지옥을 경험한 거죠. 지금은 매일 저녁 예배를 드리고 믿음이 자라 세례도 받았어요.

– 재정이나 지원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혼자 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복음으로 하나 된 동역자들을 허락해 주셨어요. 서로 연합해서 한글도 가르치고, 기타도 가르쳐요. 하지만 우리 목적은 복음입니다. 네팔에서부터 믿음이 있던 형제들과 힌두교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데, 이 모임을 어떻게 예배공동체로 끌어갈 것인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가족들이 건강하고, 이주민에 대한 주님의 마음이 식지 않고 의무와 형식이 아닌, 한 영혼에 대한 귀중함을 알고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또, 함께 이 사역에 연합하고 계시는 권사님이나 한글학교 선생님들, 이주민을 전도하는 지체들이 함께 하나님 영광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이주민 사역의 중요성을 알고, 이 사역에 뛰어들어서 이주민들을 품고 변화시키길 기도해 주십시오.” [복음기도신문]

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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