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될 사람이다”

▶ 윤함애 사모의 유언을 막내 딸 이사례 권사가 옮겨쓴 글(출처: 이기풍선교기념관)

조선선교열전 (21) – 제주도편 | 이기풍 선교사와 윤함애 사모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긴 2018년,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133주년을 맞았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개신교 선교 역사는 문화, 교육, 의료 분야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한반도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우리나라 곳곳의 선교 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편집자>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22:7)

한국의 첫 번째 파송 선교사인 이기풍 선교사의 별명은 ‘평양의 사도바울’이다. 어쩌면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이 바울 사도와 닮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평양성의 포졸로 근무하던 이기풍은 애국심과 정의감이 투철해 양민들을 착취하는 탐관오리와 서양 귀신을 전하여 나라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외국 선교사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불량배들을 모아 건축 중이던 교회 건물에 불을 지르는 등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다.

어느 날 시장통에서 전도하던 마펫 사무엘(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이후 곧 청일전쟁이 일어나 원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 그는 그곳에서 외국인 스왈른 선교사가 전도하는 것을 보며 마펫을 떠올리게 된다. 지난날 그가 한 일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중 한 꿈을 꾼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이후 청년 이기풍은 스왈른 선교사를 찾아가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후 스왈른 선교사와 함께 전도활동을 하게 된다.

1903년 이기풍은 그가 돌을 던져 턱을 크게 다치게 했던 마펫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배우고, 1907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다음 해 제주로 파송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돕는 배필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이기풍 선교사 기념관의 전시관에 전시된 자료들을 살펴보다 보면 눈길을 뗄 수 없는 전시물이 하나 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쳔 내 승쳔 예수텽국 내텬국 사모하난는 쳔당집 지금 차자가오니 영원무궁하도록 주와 갓치 살리라…’

이기풍 선교사의 아내 윤함애 사모가 지은 찬송 가사이다. 이 외에도 자녀에게 남긴 유언을 통해서도 이 땅에서 어떤 믿음과 가치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전이 되면서도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윤함애 사모는 황해도의 한 진사집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문밖출입이 어려웠고, 이를 불쌍히 여긴 윤 사모의 부친은 딸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글을 가르쳐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윤 사모가 15세 무렵 말라리아에 걸렸으나 당시 치료방법이 없어 오랜 시간 병치레를 하며 죽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 언더우드 선교사의 조사가 뜬금없이 전해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한 마디를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러던 중 어떤 빛이 온몸을 비추고 방 밖으로 나가는 꿈을 꾸고 난 뒤 굳었던 몸이 풀리며 병이 낫게 되었다.

윤 사모는 자신을 살려주신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어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을 두고 “양 코베기가 윤씨 처녀에게 손을 대었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양반인 아버지는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며 머리를 빡빡 밀어 그녀를 가둬 버린다. 이 일을 놓고 기도하던 윤 사모는 “땅을 파라”는 음성에 3일 동안 담 아래의 땅을 파 성경책 한 권을 품고 부모님과의 절연을 각오하고 집을 나섰다. 그녀는 보름 동안 고생한 끝에 노숙자 행색으로 평양에 도착하여 마펫 선교사를 다시 만나 주님께 헌신하여 살기로 한다.

주를 위해 독신으로 살고자 결단한 그녀에게 어느 날 마펫 선교사가 결혼을 권했다. 이기풍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전처와 사별하고 갓난쟁이 아기로 인해 신학을 계속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주를 위해 그가 신학을 잘 마치도록 결혼하여 도우라는 것이었다. 결혼에 대한 마음을 내려두고 있던 윤함애는 마펫 선교사의 말에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함애야, 함애야. 네가 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 네가 희생제물이 되어 이기풍이 훌륭한 주의 종이 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이기풍과 가정을 이루게 된다.

윤 사모는 이기풍 선교사의 든든한 동역자로 믿음의 걸음을 지지해 주었다. 이기풍이 평양신학교 과정을 마칠 즈음 제주도 사역지를 결정해야 했을 때, 고민하고 있던 이기풍에게 ‘우리가 가지 않으면 누가 그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느냐.’며 제주 선교사로 자원할 것을 강권한 것도 윤 사모였다. 이후 윤 사모는 너무 험난한 제주의 사역의 시간 속에서 이기풍 선교사가 흔들릴 때마다 끝까지 순종하도록 붙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윤 사모는 결혼 전 서양식 의학기술과 기초적인 산파기술을 배웠는데, 제주에 내려왔을 때 이기풍 선교사가 전도하러 간 사이 가까운 동네에 있는 산모의 출산을 도운 것이 소문이 나 동네 사람들의 산파 역할을 감당했다. 뿐만 아니라 몹쓸 병에 걸려 죽은 동네 사람의 시신을 정성껏 처리해 주고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사역 등을 하였다.

이기풍 선교사와 윤 사모의 딸인 이사례 권사에게 기억되는 윤 사모의 삶은 헌신적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었다. 이기풍 선교사가 병환으로 전라도 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겨 갔을 때에도 나병 환자들을 반겨 먹을 것을 내어주며 그들을 섬길 준비를 항상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섬김 후에는 항상 기도로 그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곤 했다. 이밖에 그녀의 유언장에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향한 헌신적인 그의 신앙이 담겨 있다. [복음기도신문]

김성옥 선교사
참고문헌: 한국교회 첫 선교지 살리는 공동체 100년, 제주 성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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