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려움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합신 이대위의 이단 시비에 대한 김용의 선교사의 고백

본지는 창간호부터 ‘복음이면 충분합니다’라는 기고문의 고정 필진으로 동역 중인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사·LOG미션 대표)를 만났다. 최근 예장 합신교단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하 이대위)로부터 이단성 있다는 문제 제기에 대한 김 선교사의 입장과 그동안의 경과 과정을 들어본다. <편집자>

어느 날 자고 깨보니 유명해져 있고, 자고 깨보니 어느덧 이단이 돼 있는 이런 상황이 좀 당황스럽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실제로 내 인생을 바꿔놨고, 평생 이 복음의 기쁨에 사로잡혀 나 같은 불쌍한 영혼들에게 멈출 수 없이 복음을 외치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복음이 왜 우리에게 별 볼 일 없는 복음이 되고 서류보관용 복음이 되고, 화려한 세상 앞에서 퇴색해진 신학, 교리용 복음이 되어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지 못하고 실제가 되지 못할까. 그런 안타까움의 몸부림으로 복음학교가 시작됐습니다. 그 복음을 만난 사람은 당연히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를 통해서 가정이 바뀌고 교회들이 활력을 얻는 등 기쁨의 행진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십자가의 도가 어떤 이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복음을 받는 이들의 반응이 제각각이어서 ‘과도한 열심이 복음의 본질을 흐릴지 모른다’라든지, ‘교회를 어지럽힌다’든지 하는 염려가 겹치면서 오늘 이단 시비까지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의 시작은 장로회 합신교단이었습니다. 합신교단 내 수원 노회의 한 목회자가 본인의 교회에서 복음학교를 다녀온 사람에 의해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사실의 정확한 확인도 없이 2014년에 합신 이대위에 조사를 촉구하게 되면서 촉발됐습니다.

4년 만에 이 문제가 불거졌고 그동안 우리에게 한 통의 이메일이나 질문이나 사실 관계를 확인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이 가장 극단적인 결론인 이단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진행되어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해서 공청회에 참여했더니 공청회마저 마녀사냥식으로 이단이라는 일방적 결론을 내놓고 진행하였으며, 이후 복음학교가 마치 이단으로 결론이 난 것처럼 검증되지 않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SNS를 통해 퍼뜨려 놓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내 인생 전부를 바꾸어 놓은 일이고 온 열방이 들어야 할 복음이기에 다툼으로 하든 허영으로 하든 전파되는 건 그리스도니까 나 또한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던 바울처럼 제 마음에도 한편 그런 기쁨이 있고 이것 때문에 의기소침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씁쓸한 것은 개혁주의의 보루라고 말하는 고(故) 박윤선 목사님의 정신을 이어받고 한국의 개혁주의 선봉에 섰다고 스스로 말하는 합신측에서, 그것도 진리를 수호하고 복음이 방해받지 않도록 거침돌을 제하고 교회를 살리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이대위에서 이단이라는 결론부터 내놓고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또 주님의 나라를 같이 기뻐하고 복음의 동지가 되어 좀 다른 것은 서로 권면해주고 책망해주고 모르면 가르쳐 주면 될 일인데 무슨 적을 대하듯이 같은 성경을 믿고 한 주님을 고백하면서 이런 식으로 흠집을 내고 주님의 교회를 파당 짓는 일로 갔다는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나의 복음에 대하여

이대위는 크게 세 가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복음학교 훈련과정 중 ‘나의 복음’ 시간이 죄 고백하는 시간이며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나의 복음’은 5박 6일간 진행되는 복음학교의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이대위는 ‘나의 복음은 공개 죄 자백이다. 공개 죄 자백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몰아붙인다. 나의 복음을 해야 그게 복음이다. 고로 그것은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다.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으니 이단이다’ 이대위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한 의도로 왜곡된 논리입니다. 공청회에서도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고 복음학교를 다녀가신 분이라면 이들의 주장이 결코 근거 없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복음학교의 목적은 ‘나에게 실제가 된 복음’이며 주제는 ‘복음을 영화롭게 하라’입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총체적인 복음 앞에서 종합검진 받듯이 내가 믿고 고백하는 복음이 나에게 정말 실제가 됐는지 확인하고 경험할 기회를 드린다고 마련한 것이 복음학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된 복음,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주제로 한 이 복음의 진리 앞에 내가 자발적으로 스스로 변화받고 싶어서 복음 앞에 서는 기회를 주는 것이 복음학교의 정의입니다.

복음을 듣다 보면 ‘내게 왜 이 엄청난 진리가 실제가 안 되나?’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때 ‘자기 스스로 점검해 보라. 복음이 남의 복음이 돼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라는 의미로 훈련기간에 각자가 자신을 복음 앞에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그중에 믿음으로 하지 못했던 게 있다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확증하고 선포하면서 본인에게 확증하는 시간이 되라고 문자 그대로 ‘나의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신학적 의미로 다른 해석을 유도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복음’은 표현 그대로, 나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평생 울어도, 애를 써도, 교리를 외우고 연습해도 헤어날 수 없었던 비참한 죄인의 삶에서 복음을 실제 믿으니까 새 생명이 나의 것이 됐다” 이 감격을 이야기하려니, 어떤 죄인에서 나를 바꾸어주셨는지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이것을 공개 죄 자백을 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누가 강제로 이것을 하겠습니까. 본인 안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고백하고 실제가 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나의 복음인데 이것은 공개 죄 자백이 아니라 간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좀 더 성숙하게 했으면 좋았겠지만, 우리도 그 과정을 다 겪어오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을 보편화해서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억지 논리일 뿐이고 이미 신학위원회에서 이 사건에 대해 작성한 검증보고서에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밝혔음에도 이대위에서는 계속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복음이 없다는 말에 대하여

이대위에서 주장하는 것 중 또 하나는 복음학교에서 교회에 복음이 없다고 가르치면서 교회를 폄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늘 간증을 통해 말했듯이 복음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극단적으로 헌신했다고들 하지만 전 늘 부족한 마음이 듭니다. 전통적인 한국교회에서 양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잘났던 못났던 어머니 태와 같은 한국교회 없이 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내 생애 다른 생각할 여지 없이 교회밖에 없는 줄 알고 섬겨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멸망할 나에게 독생자를 주셔서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 이게 사실이라면 천하에 이보다 더한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복음을 가진 교회가 이 복음을 누리지 못하고 걱정하고 위기라고 하기에 다시 복음 앞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이 복음이면 역사를 바꾸고 운명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아무것도 없었어도 이 복음으로 로마와 온 세상을 바꿨고 중세에는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복음학교를 시작한 지 16년이 넘었고 다시복음앞에라는 주제를 외쳐 온 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다시 복음 앞으로 돌아가려면 우리의 아픈 부분을 돌아봐야 하겠기에 이야기했던 말들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폄훼한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사데 교회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서만 봐도 이 백성이 다 나를 버렸다 하시고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다 배도했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이 말씀들의 의도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돌아오라는 것이죠. 복음학교를 왜 했겠습니까. 한국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극단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청교도들의 청지기 사명이라고 말하는 성경적 개념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다 주님의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청지기로서 개인 이름으로 소유가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차이가 없는 무소유를 이야기했다는 것이 교회를 허물고 폄훼하고 극단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저는 용납이 안 됩니다.

더군다나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이 루터, 칼빈, 얀 후스이고 그 뒤를 따른 개혁자들은 전부 죽임을 당한 극단적인 좁은 길, 생명의 길, 진리를 따라 갔으니 우리도 그 길로 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를 폄훼했다니요. 또 ‘신학교리가 복음이 실제가 되는 일에 전혀 도움이 안됐다’는 말을 똑 떼다가 문제 있다고 고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요지는 “사도신경도 하고 신학교리를 다 고백하면서도 어떻게 우리에게 이렇게도 실제가 안 되냐, 당신의 믿음이 실제인지 아닌지를 돌아보라”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대위는 기독교의 교리가 복음이 실제 되는데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고 제가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 무용론을 이야기 한 것처럼 공격하면서 한국교회는 복음이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완전성화를 주장한다는 말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이대위는 복음학교에서 완전성화를 주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논란이 되었던 로마서 7장 24절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복음으로 살 수 있다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으로 보면 이 이야기를 할 때 ‘바울이 중생한 후에도 두 마음이 싸운다. 복음이 놀랍지만 복음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성화를 복잡하게 만든다.

자기가 결단 안하고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서 ‘성화는 하루아침에 안 돼. 나중에 죽을 때 완전하게 되는 거’라는 식의 합리화를 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 최선과 열심으로, 율법적으로 살아도 안 된다. 행위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율법이 잘못되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말이냐’고 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옛 육적 자아의 연약함 때문에 할 수 없다” 그러나 8장 3절 이하에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즉 옛 사람의 모든 죄에 속해 불가능했던 우리의 운명을 십자가에서 끝장 내 주시고, 나 예수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된 이 놀라운 십자가 부활의 연합을 통해, 믿음의 연합을 통해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산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설명하면서 “이제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 믿음으로 살면 복음대로 살 수 있다”고 했더니 완전주의라면서 극단이고 편향된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선언하고 있는 바는 로마서 6장 3~4절에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아서 함께 장사되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6장 6~7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입니다. 이대위의 논리로 따지면 이것도 완전주의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7절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퍼질러 앉아 있으면서 성화의 과정 중에 있으니까 이렇게 사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또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이야기에 공로주의로 가려고 한다는 주장을 이대위가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신학위원회에서 공로주의가 아니라 믿음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는 결론이 내린 이야기입니다. 복음학교는 신앙 논쟁하자는 게 아니라 성경대로 믿도록, 실제가 안된 게 안타까워서 복음 앞에 서자는 것입니다.

복음학교는 성경대로 믿도록 안내하는 곳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긴장과 경계를 허물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이 세운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를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지금까지 나왔던 여러 가지 억측과 추측, 곡해들이 복음학교 현장을 경험하게 되면 충분히 진정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복음학교 참석이 어렵다면 그 내용을 텍스트로 정리한 책을 읽어보아도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진리에 한 소망을 가졌으니 얼마든지 교제하고 함께 동지가 되어 이제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에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전 지구촌에 있는 복음기도동맹군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단 시비 받고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아들을 잡으면서까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논란 중에서도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게 한이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더 드리지 못한 게 한이고, 더 희생 못 한 게 한이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 만날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것을 채찍으로 알고 더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며 달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복음기도신문]

[관련 영상] 김용의 선교사 “내가 이단이라구요?” 첫번째 이야기
김용의 선교사 “내가 이단이라구요?”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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