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중계1] “복음학교는 제게 브니엘의 새 아침과도 같습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십자가복음”

박원옥 목사(산돌감리교회)

순회선교단은 지난 7월 26일 선한목자교회(유기성 목사)에서 복음학교 컨퍼런스를 열고, 복음학교의 역사와 지역교회가 복음학교를 통해 경험한 다양한 은혜를 목회자들의 진솔한 고백을 통해 소개했다.<편집자>

저는 7년 전 4월에 복음학교라는 통로를 통해서 저를 바꾸신 귀한 복음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제가 복음학교 수료하는 날 하나님 앞에 새로운 결단을 했습니다. 대가 지불하고 제가 목사로서도 아니고 또 다른 것 아닌 오직 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살겠습니다. 손을 들고 딱 일어나는데, 갑자기 제 인생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으로 저를 딱 주저앉히셨습니다. 아픔이었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런 아픔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이건 이상한 아픔이었습니다. 야곱의 환도뼈 같은 생각을 주셨습니다. 갑자기 결단하고 일어서는데 왜 이렇게 주저앉히시는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건이 저에게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게 해주셨습니다.

복음학교는 주님을 잘 따르고 잘 안다고 생각하다가 지치고 낙심해서 주님을 잃어버리고 낙향의 길을 걷고 있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같은 저를 주님이 다시 찾아주신 자리였습니다. 저를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은총의 기회였습니다. 저의 눈을 다시 열어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저는 지식적으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공부를 하고 가르친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난 주님 앞에, 말씀 앞에, 복음 앞에 저를 비추어 보니 지식과 교리에 의한 복음을 저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서 저 혼자 좋아하고 즐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게 아니라 주님 혼자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주님 혼자 죽으신 십자가, 주님 혼자 사신 부활을 그저 지식적으로 동의하고 즐거워하고 살았던 것이죠. 제 존재가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성령체험, 성령의 불세례, 다시 태어나는 진정한 거듭남의 자리였다고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의 영광은 다름 아닌 저를 향하신 위대한 긍휼하심의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그 빛나는 영광 안으로 들어와서 주님을 누리게 하시는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재초대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못 박히는 구체적 죽음을 경험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병든 자아, 사탄에게 묶여 살면서 여전히 죄에 종노릇하면서 인간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속임에 자신을 방치하며 살고 있었던 비참한 자였음을 보았습니다. 복음을 무력하게 만드는 지식적, 교리적, 신학적 동의에 머물고 그 복음의 능력이 나에게 실제가 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속임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며

복음학교를 통해 원래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의 능력과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누리게 되는 실제적 사건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이 복음은 처음부터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나 죽는 사건이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신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복음을 받을 때 이렇게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는 분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배우지 않고 거의 비슷한 복음을 배운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사는 저는 정말 이상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제가 정말 모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 줄 알았습니다. 수 없는 죄에 대한 가책과 자책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습관적인 죄를 짓고 살아가는 제 모습을 보면서 주님 앞에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제가 배운 회개를 했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반성했습니다. 금식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해보고 작정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지쳐갔습니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가련하고 한심했습니다. 그러면서 안그런 척 꾸미고 위장하고, 선한 척 하면서 목회도 하고 설교도 했습니다. 집사람이나 자식들 앞에서는 그럴듯한 남편이요, 그럴듯한 아버지로 포장하고 살아가는 제 모습은 사실은 죽을 맛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다 내려놓고 벗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에 어느 때는 정말 이거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끈질긴 절망의 상황은 죽음으로만 끝이 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숨어있던 나 자신을 드러내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주님이 날 위해 죽으신 그 자리에 내가 그런 너와 함께 죽었으니까 이리로 와서 누우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죄와 사탄과 병든 자아 안에 갇혀서 그토록 고민하며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있으나 이제 그 분의 영광 안으로 초대하시는 자리였습니다. 병든 자아의 나, 죄에 종노릇하는 나를 장사지내는 무덤이 십자가였습니다. 나의 장례를 집행하시는 구체적인 자리였습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이 두려움을 통과하는 자리가,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연합해서 내가 죽는 그 자리가 회개하는 자리구나. 내가 십자가를 통과하는 자리구나. 이것을 정확하게 보게 하셨어요.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도 우리 교우들 중에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바로 얘기합니다. 참된 회개로 주님의 십자가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만 혼자 죽으신 게 아니고, 주님 죽으신 그 자리에 병든 내 옛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에 같이 죽고, 다시 부활해서 예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구체적인 경험을 하는 자리입니다.

복음학교,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시간

제가 경험한 복음학교는 십자가의 복음이 죄 된 나, 지옥의 고통과 저주받은 인생으로 사는 나를 주님이 죽이시는 자리였습니다. 나 혼자는 못 죽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죽으시는 자리에 나를 초대하셨습니다. 나의 수치스러운 죄 된 옛 자아가 드러나는 순간 주님은 부활의 빛나는 세마포로 가려주시고, 덮어주시고, 복음의 그 찬란한 빛과 영광 안으로 나를 초대하셨씁니다. 그 자리는 정말 제 인생 제 존재가 뒤바뀌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복음은 저에게 실제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토록 끊어지지 않았던 죄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끊어졌습니다. 제가 힘쓰고 애쓰고 자책하고 수많은 후회와 반성과 십자가 앞에, 주님 앞에서 엎드리며 사탄의 정죄 앞에서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르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수많은 날들을 울부짖어도 끊어지지 않았던 그 죄가 그 날 이후로 끊어졌습니다. 제 의지와 노력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가족과의 수많은 갈등 속에 늘 부딪치고 자존심 하나도 넘어서지 못하면서 관계싸움하며 지냈던 그 인생. 변한 내 모습을 보고 집사람이 처음엔 복음학교에 복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아내를 복음학교에 보내시고 다녀와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 여전히 부딪치는 갈등의 요인이 있지만 그 때와 지금 다른 것은 그 때는 자기감정, 기분에 따른 결론이 앞섰다면 지금은 주님의 말씀이 결론됩니다. 매 순간 주님의 말씀이 결론 되어져서 십자가로 갑니다. 그냥 결론이 어딘지를 압니다. 그래서 매순간 주님 안에서 그 복음의 영광 안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저희 며느리가 독일에서 11년 살다가 귀국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같이 살게 되어 시아버지가 담임하는 교회를 얼마간 나오게 됐습니다. 예배 시간에 제가 말씀을 전하는데 아들 옆에 앉아있던 며느리가 난리가 난겁니다. 신랑을 쿡쿡 찌르면서 붉으락푸르락 하더니 뛰쳐나갔습니다. 표정을 보니까 뭔가 부딪친 겁니다. 나중에 집에 가서 물어보니까 신랑한테 아버님 저렇게 설교하시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던 며느리가 복음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 발로 찾아 갔습니다. 저는 기도만 했지요. 갔다 와서 신랑에게 하는 말이 아버님이 왜 그렇게 말씀을 전하시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고는 사돈 아가씨도 복음학교 보내고, 자신의 엄마도 보내야겠다고 하는 겁니다. 복음학교를 다녀온 사돈 아가씨는 마른 뼈처럼 앉아서 예배드리고 있던 자기 영혼의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답니다.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복음의 능력을 복음학교를 통해서 저와 가족들이 아름답게 누리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물음앞에 서다

저는 복음학교를 다녀온 후 결단을 하고 교회에 대한 저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길에 대한 주님의 길을 물으며 칩거생활을 좀 하려고 했습니다. 다 내려놓는데 주님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있던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이 물으셨던 것처럼 ‘이 목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 아내보다 네 자식보다, 네가 지금 목회하고 있는 교회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잖아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가 용기 없는 것을 주님이 잘 아시잖아요. 주님 제가 자식을, 아내를, 교회와 목회를 버리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라는 것을 주님이 아시잖아요” 목회를 벗어버리고 싶었습니다. 복음 앞에 다시 서기 전에 죽고 싶은 마음은 있었어도 용기가 없어서 못 죽겠더군요. 지옥의 형벌이 두렵고,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될지 미래가 걱정이 됐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게 그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네 주님이면 충분합니다.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제가 교회를 그만두려고 결정을 한 것을 주님이 아셨습니다. 저 같은 자는 목사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냥 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이 여시는 그 길을 새롭게 걸어가겠습니다” 그렇게 결정했는데 주님이 저를 교회에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목회를 하게 하신 이후, 얻게 된 공동체적 유익은 복음을 처음 받아들인 이들에게 복음을 더욱 분명하게 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저에게 성경을 보는 눈이 다시 열렸습니다. 복음을 명확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에둘러 전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새로 믿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지극히 상식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펑펑 울면서 “제가 어찌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목사님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떨면서 복음에 반응했습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는 하나님께 용서구하고, 대가 지불 해야 할 것 있으면 지불하고 남편에게 아내에게 잘못한 것 있으면 용서를 구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결단을 하는 그들에게 복음이 실제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결단이 수반됩니다. 나냐? 세상이냐?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을래?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을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그 순간에 그 결단에 참예하지 못한 분들은 고민 속에 살다가 부딪쳐야합니다. 다시 주님 앞으로 오던지 세상에서 살던지 둘 중에 하납니다. 그런데 복음을 안다는 분들, 기존 성도들, 복음을 다시 재발견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이 거침없이 전해지는 복음이 그들에게는 거치는 돌입니다. 싫어합니다.

수많은 기존의 틀을 벗기 어려워하고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고 숨겨진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못 마땅해 하는 이런 반응은 교회가, 저의 목회 자리에서 돌파해야 될 기도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 가운데서도 다시 주님을 만나고 다시 복음의 진리 앞에 세워져가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목마름에 구도자의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마라의 쓴 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되어서 그 물을 마시듯, 나아가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신령한 음료를 마시듯, 새로운 복음의 영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역사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정과 시간은 필요해도 복음이 전해질 때 주님은 이미 말씀하셨잖아요. 가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져도 다 환영하고 할렐루야 하는 것이 아니다. 네 집안 식구가 네 원수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면 하물며 교인들이겠습니까. 복음이 정확하게 전해지면 자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리로 가야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옵니다. 가기 싫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주님이 하십니다. 7년을 지나오면서 그동안 에둘러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았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착하게 살고 음란하게 살지 말라고 청년들에게 설교할 때에 혼외성관계 같은 문제는 에둘러 얘기했죠. 그러나 지금은 저의 허물과 잘못을 나누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인정하고 전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저항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교회는 날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함께 하는 믿음의 발걸음

우리 교회에서 순회선교단(이하 선교단)의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교회 식구들이 선교단에서 주관한 훈련과정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한 형제는 바둑을 전공해서 가던 길에서 복음을 듣고 돌이켜서 헤브론선교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가족들이 우리 교회 와서 다시 말씀 앞에 서서 주님 바라보고 복음 안에서 말없이 교회를 섬기고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본이 되고 있습니다. 훈련을 많이 받으신 분들이 교회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그분들의 삶을 통해서 다른 교우들이 선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수많은 세미나, 프로그램을 과거에 도입해봤습니다. 저도 갖가지 영성훈련, 각종 세미나를 도입해봤지만 안변했습니다. 나도 안변하고, 교인들도 안변하더군요. 그런데 복음을 다시 만나고 주님을 다시 만난 경험이 분명한 분들 가운데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인 헌신을 합니다. 시험에 들 만한 일이 있어도 예전처럼 자기감정이 결론이 아닙니다. 그냥 십자가로 가십니다. 느헤미야52 기도와 말씀기도가 자발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열방을 품고 영혼들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을 위해 선교적 존재로 부르심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눈이 떠져서 그 길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분명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역의 우선순위가 무언지 정확하게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시요, 복음이 교회의 존립의 근거입니다. 생명의 근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 열매 추구와 그 결과에 따른 교만과 낙심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주권과 주님의 말씀의 순종에 따른 귀결로서의 영혼구원과 하나님나라의 부흥에 초점집중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장은 참된 변화를 위한 계속되는 과도기적 단계 과정을 거처가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과제가 또 저에게, 우리 공동체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함께 한국교회를 위해서, 내 사랑하는 조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제목이기도 합니다.

저는 복음학교를 통해서, 선교단의 형제자매들의 아름다운 삶의 여정들을 통해서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교회의 모습을 봤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목사가 되어서 한 번도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는데 말씀대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복음이 실제 되어서 주님 한 분을 주인 모시고 살아가고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이 이끄시는 방법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분들의 삶이 있음을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단의 형제자매들의 삶을 본받고 싶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와 우리 공동체 안에 주님이 일하셔서 동일하게 그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고 복음이 실제가 되서 누려지는 그러한 영광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건 없는 연합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가 되어서 한국교회와 선교단체가 연합해 나아갈 때 얼마나 많은 복음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겠는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몸부림이지만 그런 공동체를 한국교회 안에 세워보고 싶은 주님이 주신 꿈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렇지, 복음이면 되겠구나! 아 복음이면 되지! 나를 변화시키시고, 내 가족을 변화시키신 이 복음이면 교회가 변화되겠구나. 수많은 교회가 지탄받는 모습들, 지도자들이 무너지는 모습들이 다름 아닌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소망, 주님이 포기하실 수 없는 소망은 여전히 주님의 복음입니다.

복음에 근거한 성경적 상황화 모색 중

그래서 이 영광을 함께 누리고 싶어서 나아가는 지금 선교단에 대해 또 다른 의혹의 눈초리와 예의주시하는 이단시비가 일고 있는 상황들에 대한 대처가 필요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선교단의 훈련을 거치고 공동체로 살아가시는 형제자매 여러분들의 삶의 표현. 주님을 향한 표현에 대한 개교회와의 과제를 제가 안고 있습니다. 복음학교에 대해 시비를 거시는 분들이 우리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이런 겁니다.

“무서워요 목사님. 저분들 보면 무서워요. 말하는 표현도 무섭고 너무 저돌적이에요” 또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하면 “내가 한 게 없어? 맨날 주님이 하셨어?”하며 비아냥거립니다. 하나의 예로 선교단의 구호같은 표현들이 이질감, 위화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목회현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근거한 성경적 상황화 방법을 모색 중에 있습니다. 제가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훈련받았을 때 사용했던 용어들은 교회에서는 안 씁니다.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싫은 자들, 과정이 필요한 자들의 구분과 이에 따른 양육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복음을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는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지속적 나눔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훈련받은 분들도 그때는 가슴이 뜨거워서 결단도 하고 했는데 삶을 살아내는데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기에 다시 그들을 어떻게 삶에서 복음으로 살아내도록 나누고 그들을 세워야 하는지 숙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의 체질이 오직 주님, 오직 복음이면 충분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교회는 변화에 따른 초기 몸부림과 과도기에서 벗어나 생명을 낳아서 올바로 양육하고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을 향한 생명의 역사가 풍성한 이 부흥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소망의 걸음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복음의 진리와 영광의 소망에 많은 교우들의 마음이 서서히 집중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도전과 응전은 계속해야 할 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 공동체의 이 걸음과 소망이 결코 부끄럽거나 약화될 수 없고 이 걸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 길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요 영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학교는 이 세대에 주님 안에서 한 형제 된 우리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훈련학교로서 참 좋은 선물 중의 하나로, 복음의 통로로 여겨집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복음학교는 주님과 복음 앞에 내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참 고마운 자리로서 엄청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데 눈을 뜨는 브니엘의 새 아침의 자리였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복음학교는 말씀으로 주님 앞에서 분명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세우는 참 회개와 성화의 삶으로 이끄는 전환점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십자가의 복음, 그 부활의 영광에 나를 분명하게 세우는 터닝포인트였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 교회 안에 있는 분들이나 밖에 있는 분들이 동일하게 직면하게 해야 할 십자가의 위대한 사건이요, 복음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복음의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통로는 영원한 것이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대를 따라 모양도 색깔도 바뀔 수 있는 것이 통로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과 복음과 그 내용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의 길을 주님께 물으며 주님만을 주목하며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복음의 진리를 붙잡고 굴함이 없이 담대하게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세심하게 형제와 교회들의 상황을 잘 살펴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고 나아가는데 복음학교가 주님 안에서 사랑과 지혜의 통로로서의 형식과 식양과 모양의 변화는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영광이요, 이 모든 일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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