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움직일 수 없는 복음은, 내게 복음이 아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있다면 가장 복된 자리,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새벽을 깨워 나아오는 것이다. 이 땅에 잠시 왔다가 세상에 살면서 가야 할 곳이 많고 해야 할 것이 많은데,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 사모하여 거룩한 성소로 달려와 무릎을 꿇은 자리, 다름 아닌 ‘예배’의 자리에 나와 사랑하는 주님을 독대하며 엎드렸다는 것은 천사가 놀랄 일이다. 왜냐하면, 예배의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제물)로 드릴지니라”라고 명했는데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θυσίαν)로 드리기 위해 나왔기 때문이다.

예배는 내가 죽으려고 나온 자리

‘제사’, ‘예배’란 말은 헬라어로 ‘뚜시아’(θυσία)다. 어원 ‘뚜’(θυ)가 들어가면 ‘타다, 태우다’(burn), 태우면 냄새가 나니,‘냄새나다’(smell)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헬라어 동사, ‘뛰오’(θυw)는 ‘죽이다, 희생제물로 드리다’(kill, sacrific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예배의 자리는 ‘그냥 왔다가 예배 보고 그냥 가는, 도장 찍고 가는 하나의 의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죽음의 자리’이다. 나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자리이다. 매일, 매주 마다 예배에 나왔다는 것은 내가 바로 죽으려고 나온 것이다. 모두가 살려고 할 판에 죽으려고 나왔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도 바울이 문제 많고 잘난 고린도 교회에 고백한 유명한 말을 보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καθ’ ἡμέραν ἀποθνῄσκω, I die daily)”(고전 15:31)

고린도 교회 성도들아 내가 너희에게 자랑할 것이 하나 있다. “카뜨 헤메란 아포뜨네스코, 내가 날마다 죽노라” 가장 정확한 예배의 정의다. 예배는 매주 드리는데, 나는 믿음이다, 나는 복음이다, 이렇게 말은 하는데,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서 갈수록 흉해지고, 믿는다고 하는데 여전히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대로 하는 사람, 신실함이 없는 사람, 변화가 전혀 없는 사람, 말씀에 순종이 없는 사람은, 나의 구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점검해야 한다. 이건 보나 마나 가짜다.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눅 9:23), 나의 제자가 되고 싶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도의 클라이막스(climax)는 나의 장렬한 죽음이다. 나에 대해서는 공중에서 분해를 시키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눅 9장 23절이 24절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신자는 다른 것으로 말하지 않고 장렬한 죽음으로 말한다. 내가 죽어야 그래야 ‘쏘조’(σῴζω, save, 구원하다) 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쏘조)” 그래야 그 때 그 사람이 자기 목숨을 구원하리라, 즉 구원을 받으리라. 복음의 결론이다. 복음은 단순하다.

나를 이렇게 장엄하게 죽이는 것이 복음인데 내가 죽기는커녕 내 마음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죄악에 질펀하게 앉아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자의 실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복음으로는 안된다고, 믿음으로 살 수 없다고, 안 살아진다고. 그러나 이것은 사탄이 주는 거짓말이다.
성경은 말한다. 그런 복음은 없다고! 나를 움직일 수 없는 복음은, 더 이상 내게 복음이 아니다. 그가 복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위에서 오는 그 복음(τὸ εὐαγγέλιον)에 부딪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을 만나고 실제 된 자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복음기도신문]

김명호 교수(복음기도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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