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만난 주님을 전하고 싶어요”

지금도 목마른 김종훈․김희영 선교사 부부

[199호 / 인터뷰]

하나님으로부터 각각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단기선교를 나갔던 L지역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 나이는 같지만 서로가 너무 달라 호감조차 없던 사이였다. 각자의 사역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장기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던 때, 그들은 각각 자신들의 위치에서 선교와 멀어져갔다. 목마름 가운데 있던 그들을 생수 같은 복음으로 깨워 이제는 한 몸을 이뤄 L지역에 다시 파송하시는 예수님의 선교이야기를 김종훈, 김희영 선교사 부부를 통해 들어봤다.

– 그동안 많은 훈련과정을 거치고 선교지로 나가시는군요. 혹시 모태신앙이신가요?

김희영(이하 영):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10살 때 어머니가 빚을 많이 지고 집을 나가셨어요.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어요. 교회에 다니던 어머니가 늘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은 가족들은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기독교에 반감이 생겼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럴 수 있지?’라는 생각에 절대 교회에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에 다녔어요. 여전히 기독교를 비판했지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어요. 뭐든 열심히 하는 제 모습을 보시고 선생님이 신앙부 임원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장학금을 준다는 말에 한다고 했죠. 그냥 웃고 떠들면서 열심히 생활하다 어느 날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게 됐어요. 부흥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성가대석 커튼을 떼고 있었는데 키가 크다는 이유로 그 마무리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또래 청소년들과 이야기가 시작됐고 청소년기도회에 초대받게 됐어요.

매일 참석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깊게 와 닿았어요. 부모도 나를 버렸는데 나를 버리지 않은 이 사랑이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한 선교사님의 순교 영상을 보았어요. ‘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구나.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는지 몰라 목사님에게 물어봤더니 신학교를 소개해주셨어요. 바로 신학교에 입학했어요”

“부모도 버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니요”

–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신학까지 하게 됐군요. 주님의 은혜네요. 신학교 생활은 어땠나요?

영: “그때까지 제가 죄인인 줄 몰랐어요. 도덕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 이성 교제를 하면서 죄를 짓기 시작했어요. 난 신학도, 선교도 못하겠다고 포기하려고 할 때 주님이 절 만나주셨어요. 이미 더러워졌다고 생각하는 나를 신부로 삼으셨다고 말씀해주셨어요. 말씀 앞에서 회복이 된 후 어떻게든 이 사랑을 갚아보고 싶어 선교단체 훈련도 받고 세미나도 찾아다녔어요. 그러나 저의 삶과 고백은 달랐어요. 사랑보다는 미움이 빠르고 교회 사역을 하면서 인정과 평판에 널을 뛰었어요. 신학교에서 계속 무언가를 배우지만 기쁘지 않았고 ‘내가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신대원 다니면서 이런 고민에 빠진 저를 보던 한 선배가 ‘복음학교’를 추천했어요. 인터넷으로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선교훈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바로 훈련에 참여했어요. 그동안 말씀대로 살 수 없어서 힘들었는데 그곳에서 말씀대로 사는 증인들을 만났어요. 성령이면 가능하구나. 주님이면 가능하다는 메시지들이 강력하게 마음에 와닿았어요”

– 주님이면 가능하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이죠?

영: “그건 복음학교에 참석한 이후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먼저 복음학교에서 제 존재가 얼마나 죄인인지 보게 됐어요. 기도를 한다고 했지만 결국 그 기도조차 나를 위한 기도였더군요. 내 마음이 동할 때만 하는 기도였죠. 금식도, 손들고 찬양하는 것도 오직 내 만족을 위해서 했다는 것을 복음의 진리 앞에서 보게 됐어요. 모든 것이 내 의가 되는 것들이었어요.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하지?’라는 질문을 갖게 됐어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죄였기 때문이었어요. 그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주셨어요. 그런 내가 죽었다는 거예요. 이제는 내 안에 사시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면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주님이면 가능하다는 것이었어요. 이 사실이 제게 큰 자유를 안겨줬어요. 그동안 사람들이 내 연약함을 알까봐 언제나 두려워했어요”

– 큰 자유를 얻은 이후의 삶이 궁금하네요.

영: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후 주님이 말씀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대로 했던 것들을 모두 멈춰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신대원을 휴학하고 6개월 동안 합숙신앙훈련에 참여했어요. 훈련기간 내내 죄와 씨름했어요. 십자가에서 내 옛 생명이 죽었다고 하셨는데 계속 살았나, 죽었나 헷갈렸어요. 끊임없이 죄 된 모습이 드러나니까요. 그때마다 주님은 십자가의 복음이 사실이면 너의 죽음도 사실이라고 알아들을 때까지 말씀해주셨어요.

그렇게 훈련을 마치고 나니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었어요. 주님이 제 주인이시니까요. 그때 에스더 말씀을 보면서 선교완성의 명령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 조서가 이른 곳마다 생명이 살게 되는 것처럼, 제가 복음을 들고 나가서 알려주기만 하면 살게 되는 사람이 많아지겠다고 생각했어요. 난 너무 많은 혜택을 받고 있었는데 예수의 이름을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이 열방엔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기도하다 L지역으로 1년 단기선교를 떠나게 됐어요. 그 땅엔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어요. 기독교를 믿기 어려운 여건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영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어요. 저는 현지인과 한인들을 섬겼어요. 그곳에 비즈니스 미션을 하는 곳도 있었죠.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그때는 저와 성향이 너무 달라 별 마음이 없었어요. 그리고 전 1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어요”

단기선교로 순종의 첫 걸음을 떼다

– 김종훈 선교사님은 어떻게 L지역에 가게 되셨나요?

김종훈(이하 훈):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저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던 사람이었어요. 어릴 때 인라인스케이트 선수를 하다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미용을 시작했어요. 부모님이 미용실을 하셨기 때문에 저에겐 낯선 일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미용을 해서 돈을 벌었어요.

어느 날, 어머니가 군대 가기 전에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뉴질랜드에 보내주셨어요. 그곳에 미용실하는 삼촌이 계셨거든요. 본의 아니게 거기서도 일을 하게 됐어요. 삼촌 집에 홈스테이하던 형이 있었는데 일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저를 보더니 하루는 ‘마음을 다스리는 학교에 가지 않을래?’라고 묻더군요. 알고 보니 그곳이 교회였어요. 처음 교회에 가서 찬양을 부르는데 찬양이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뉴질랜드도 구경하며 여행을 하게 됐어요. 자연스럽게 미용실은 안 나가게 됐죠.

그곳에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새해 약속의 말씀도 받게 됐어요. 또 그곳에서 처음으로 기도를 하게 됐어요. 죄에 빠져있는 한 사람을 보면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어요. 나뿐만 아니라 그 영혼을 건져달라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그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이 막혀버렸어요.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믿어졌어요.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주셨구나. 그럼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리며 예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 돌아와 갈 수 있는 모든 예배에 참여했어요”

– 정말 좋은 시간이 되었군요. 한국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떠셨나요?

▶ 탄자니아에서 미용으로 지체들을 섬겼던 김종훈 선교사

훈: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데 어떻게 안 꾸미고 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매일 새벽 예배 때마다 정장을 입고 머리 손질을 하고 예배를 드렸어요. 그때 저의 신앙이 단단해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군대 제대 이후 교회에서 캄보디아로 단기선교를 가게 됐어요. 어느 날 세족식을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가 마련됐어요. 제 직임은 물을 나르는 것이었죠. 리더 형들은 그들의 발을 닦고 기도를 해주었어요. 저도 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자리에 너무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물을 나르다가 말고 1층 기둥을 잡고 기도했어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제 마음에 감동이 일었어요. ‘하나님이 내 삶을 구해주신 게 맞다면 이렇게 살 수 없어요. 미용사의 삶이 아니라 선교 현장에 나를 드리겠어요. 내 삶을 써주세요’ 선교 현장을 떠나면서 다시 그 땅에 돌아오겠다고 다짐했어요. 한국에 돌아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선교 훈련을 받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어요.

오매불망 캄보디아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훈련이 거의 끝날 무렵 제가 가야 할 나라가 갑자기 L지역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그동안 주님이 불러주시면 어디든 간다고 했지만 L국에 도착하고서도 한 주 동안은 힘들었어요. 그래도 감사하게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이 L지역에 대한 마음을 부어주시더군요”

미용사가 아닌 선교사의 삶을 선택하다

–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인도하신 것 같네요. L지역에서는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훈: “비즈니스를 통해 다른 여러 나라 출신 기독교인을 만나 함께 지냈어요. 그곳에서 각국 언어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어요. 현지 청년들도 연합하기 시작했어요. 중간에 핍박도 있었어요. 불시에 경찰이 들이닥쳐 여권을 빼앗아가서 쫓겨날 뻔도 했어요. 잠깐 어려움도 있었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예배모임이 지속됐어요. 그 무렵 희영 자매를 만나게 됐어요. 그때 제가 기타를 가르쳐줬어요. 그렇게 만났지만 당시에는 동료 선교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이상 199호에 게재>

– 이 쯤에서 희영 선교사님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죠. 한국에 돌아오신 이후는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영: “주님이 그 땅에 다시 나갈 마음을 주셨어요. 그곳에는 하나님을 꿈으로는 체험했지만 이후 말씀이 없어 흔들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곳에서 자매 청년들과 성경공부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신학을 마치고 오라고 했어요. 신대원 졸업이 1년 남은 상태였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낭비에 대해, 옥합에 대해 묵상했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학교를 그만 두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복음에 빚진 마음이 컸어요. 그곳에는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은데 저는 8년 가까이를 복음을 들었으니까요.

향유옥합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해도 깨트리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친구 한 명이 예수를 믿으면 복음을 만난 사람은 또 복음을 전하게 되니, 그 땅에 가서 친구 한 명만 사귀자고 결심했어요.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이제 선교지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언니에게 종양이 발견됐어요. 지방에 있던 언니가 서울에서 수술을 해야 할 상황에 돌봐줄 사람은 저뿐이었어요. 그때 L국에 가는 건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접었어요. 다행히 언니는 암이 아니었지만요. 저는 다시 신대원에 들어갔고 교회사역을 시작했어요.

그러나 제 마음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간 베드로 같았어요. 내가 잘못 들었나? 주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았어요. 사역을 하면서도 여전히 목말랐어요. 제가 그렇게 힘들어 할 때 남편도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더군요”

– 종훈 선교사님에게 어떤 일이 있으셨죠?

훈: “저도 단기선교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 이제 선교를 어떻게 나가야할지 구체적으로 구하고 있던 중에 ‘결혼 안하면 못나갑니다’라고 기도를 해놓고는 신부감을 찾았어요. 그런데 1년 8개월 동안 결혼을 못했어요. 선교도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그냥 있을 수는 없어 다시 미용일을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제 기도제목이 이렇게 바뀌더군요. ‘주님, L국에 하나님 나라 빨리 임하게 해주세요’에서 ‘주님, 십일조 더 많이 하게 해주세요. 선한 기업이 되게 해주세요’로 말이에요.

교육관리직을 맡게 되면서 월급이 더욱 많아졌어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돈을 벌게 됐어요. 그러면서 계속 기도했어요. ‘십일조 더 많이 내게 해주세요. 그 원장님 밑에서 일하게 해주세요’ 기도하고 있는데 주님이 어느 날 ‘너 기도제목이 이게 뭐냐?’고 물으시는 것 같았어요. 상실감이 임했어요. 선교사로 주님께 드린다고 했는데 다시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다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야할지 모르겠다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길을 알려주세요기도하다

– 희영 선교사님과 비슷한 일을 겪고 계셨군요.

훈: “당시 저는 누구나 사위삼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는 청년이었어요.(웃음) 선교도 다녀오고 찬양 인도에 많은 십일조.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지기도 하더군요. 그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주님은 제가 불순종한 그 자리로 돌아가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것이 복음학교였어요.

선교지에서 희영 자매가 복음학교에 가보라고 권유해도 제가 무시했어요. 마침 서울에 올라온 자매를 만나 몇 가지 조언을 듣고 드디어 복음학교에 참석하게 됐어요. 첫날은 지옥인 것만 같았어요. 말씀 듣기도 힘들고, 잠은 오고, 하나님은 왜 나를 부르셨는지 원망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셋째 날 들려오는 메시지가 제 영혼의 깊은 곳을 건드렸어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닮을 수 있었습니까?’ 난 닮을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던 절망의 끝자락에서 주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게 됐습니다. ‘넌 내 옷을 입고 나처럼 살아다오’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깊은 울림이 있는 말씀이었어요. 내가 여태까지 노력했던 모습들, 예수님을 닮고 싶어 헌금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면서 주님 저 이만큼 하고 있습니다, 나를 알아달라며 살았어요. 내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도 모른 채 그저 합리적으로만 살고 싶어 했던 저에게 나의 전부를 포기하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이제 김종훈의 선교가 아니라 예수님의 선교를 하겠다고 다시 서원했어요. 이제 조건과 환경을 바라지 않고 무식하게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내딛겠다!”

– 주님이 역전을 이뤄내셨군요. 너무 기쁘네요.

훈: “훈련이 끝나고 곧바로 제가 함께 일하고 싶었던 원장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면서 대기업 이상의 연봉을 주겠다고 했어요. 순간 이것이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분에게 제가 만난 복음을 나누고 정중하게 거절한 후 선교훈련을 받았어요. 그리고 자매에게 전화를 걸어 배웠던 강의 내용들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기도해보라고 했어요. 아내는 저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고 했어요”

– 그때 희영 선교사님은 어떠셨어요?

영: “사실 그때 저도 힘든 시간이었어요. 교회 사역은 하지만 정작 제가 복음에 목말라 있었죠. ‘신대원 졸업만으로는 안 된다. 스펙도 있어야한다’는 수많은 소리를 듣던 중에 형제가 저에게 들려주는 강의 내용을 들으니 살 것 같았어요. 그러나 결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나 혼자 자유롭게 열방을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러나 기도하면서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나의 정욕 때문임을 알게 됐어요.

어느 날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 참석하러 갔다가 양화진에서 형제를 만나기로 했어요. 형제는 선교사기념묘지가 있는 그곳에서 내게 프러포즈를 했어요. 그러나 전 사실 결혼을 거절하려고 나갔던 거였어요. 그런데 그날은 선교사 가족 묘지가 눈에 들어왔어요. 양화진에 묻혀있는 가족 묘지들을 보면서 ‘우리 모습이 바로 저것이겠구나. 열방에 묻히는 것이 축복이겠구나’ 생각하게 되었고 참석했던 집회 말씀을 통해 결혼을 확증하게 되었어요”

– 드디어 결혼하시는군요. 제가 다 기쁘네요.

▶ wedding, 선교현장에서 지체들과 함께 한 결혼 예배

훈: “결혼식은 소박하게 치르고 신혼여행을 단기선교로 가고 싶었어요. 단기선교에 대해선 자매와 생각이 같았는데 자매가 결혼식은 우리끼리 드리자고 제안했어요. 세상에서 하는 축의금도 받지 말고 예배로 드리자면서요. 과연 부모님들이 허락하실까 걱정이 되었지만 감사하게도 허락을 해주셨어요.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결혼식을 마치고 말씀을 따라가는 아웃리치를 떠났어요.

처음 도착한 곳은 L국이었어요. 그곳 지체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결혼식을 치르지 않은 것을 알고는 현지 전통 결혼식을 준비해줬어요. 그렇게 시작된 아웃리치엔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자매가 심하게 아프기도 하고 아픈 자매를 공항에서 잃어버리기도 하고,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를 타기도 하고요.

그러나 무엇보다 그 기간 동안 우리 존재의 한계를 보게 된 거죠. 엄청 싸웠어요. 서로의 기대감도 높고 각자의 빈곳만 채우고 싶어 하던 모습들이 드러났죠. 때마다 예배드리면서 풀고,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풀었어요. 끊임없이 싸우면서 ‘우리가 무슨 선교사냐. 이게 무슨 선교냐. 한국 가자’ 홧김에 외쳤다가도 다시 회개했어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가게 되면서 갈릴리를 방문했어요. 성경을 읽으며 늘 갈릴리 호수가 궁금했어요. 호수 수위가 낮더군요. 요한복음 21장의 인생 실패자 베드로가 그 호수에서 산상수훈과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났던 곳을 둘러보며 어땠을까 생각했어요. 부활한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모든 것을 뒤로하고 뛰어갈 수밖에 없던 그 마음이 뭔지 알 것만 같았어요. 우리가 실패했던 순간들이 기억났어요. 하나님을 원망하고 아내를 미워했던 저를 주님은 그곳에서 다시 불러주셨어요. 우리가 갈 길은 이 길 뿐이구나. 아웃리치의 시간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이해하고 서로가 단단해지고 가정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시간이었어요”

아웃리치로 떠난 신혼여행에서 정체성을 찾다

– 세상에 둘도 없는 신혼여행이자 아웃리치였네요. 여행 이후엔 어땠나요?

훈: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가 어떻게 선교지에 나가야 되는지 기도했어요.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디에서 훈련받고 파송 받아라. 아내에게는 안수 받고 나가라. 그러나 그 어디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어요. 결국 이렇게 나가면 우리는 또 매일 수밖에 없겠구나. 예수님의 선교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겠으면 말씀에 깊이 들어 가보자는 마음으로 ‘말씀기도수련회’에 참석했어요. 호세아 14장에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나타내주셨어요. 저주받은 짓을 했어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모든 은혜를 부어 줄 거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이 말씀을 가지고 나가면 결국 주님이 우리를 살리시겠구나 생각했어요. 우리를 파송해주는 곳도 오직 기도해주는 공동체로 정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L국 선교사님으로부터 B지역에서 한 주 동안 열방을 위한 기도를 하는데 이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동참할 수 있으면 같이하자면서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은 먼저 번 훈련 과정 중 아웃리치 다녀올 때 모두 써버려 당시 재정이 없었어요. 오직 주님께만 기도했는데 주님이 넘치도록 채워주셨어요. B지역에 도착해 선교사님들과 함께 기도하고 예배드리면서 선교사님들이 자신을 말씀 앞에서 깨트리시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그분들은 그곳에서 학교 사역을 하고 계셨는데 규모가 꽤 컸어요. 자신들의 성공한 이야기만 해도 10일이 부족한 시간인데 그분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연약함을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이런 공동체면 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문제가 생겨도 결국 예배를 드리면 회복되는거니까요. 예배가 살아있는 공동체를 만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했어요.

그렇게 선교지가 정해지고 현지 선교사님과 준비과정을 이야기했어요. 가능하면 선교단체에서 파송을 받고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동안 그것 때문에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던 모양이었어요. 한국에 돌아와 우리를 파송해줄 단체를 위해 기도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연합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에 들어갔는데 한 파송선교단체 선교사님과 마주쳤어요. 짧은 시간에 우리 근황에 대해 물어보시다가 L국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기도카드에 ‘요셉의창고미니스트리’ 파송이라고 쓰세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희영 자매가 L국에 왔을 때 파송단체가 ‘요셉의창고미니스트리“였거든요. 희영 선교사를 단기선교로 파송했을 때부터 계속 기도해오고 있었다면서요. 기도하는 파송공동체를 구했는데 주님이 이렇게 응답해주셨어요”

– 앞으로 계획과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영: “먼저 언어훈련을 받게 되겠지만 언젠간 현지인과 복음을 나눌 수도 있겠죠. 그곳엔 예배드릴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어요. 그러나 공개적으로는 예배를 드릴 수 없어요. 밀폐된 방 한 칸에서 수십 명이 예배를 드려요.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기도해주세요. 현지 선교사님 가정과 우리 가정이 한 몸으로 동역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예수님의 선교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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