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당신에게 어떤 나라인가?

▶ 1930년대 통학하고 있는 배재고보(培材高普) 학생들(출처: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226호 / 기획 – 한국을 다시 경건하게(1)]

위기의 한국 사회. 예레미야는 엎드러지고, 거꾸러질 때, 옛적 길,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고 기록하고 있다(렘 6:16). 이 땅에 허락된 옛적 길, 그 선한 길을 찾아 길을 떠나자. 하나님이 이 민족을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 다시 되짚어 보며 이때 우리가 취할 바를 역사 속에서 발견해 보자. <편집자>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압축하면 이렇게 나뉠 것이다. ‘헬조선’. 지옥 같은 나라라는 시니컬한 반응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키며 ‘헬 코리아’가 아닌, 굳이 사라진 ‘조선’이란 국명으로 오늘의 우리가 사는 세상을 풍자했다는 사실이다. 사라진 조선에 대한 냉소적 정서를 반영한 용어일까?

이 시대를 보는 또 다른 한편의 반응이 있다. 기적을 이룬 나라. ‘꿈을 현실로 형상화한 나라, 코리아’라는 반응이다. 도저히 불가능한 현실을 뛰어넘어 한 세대만에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가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반응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은 제각각이다.

모든 젊은 세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 대해 깊은 불만과 불신을 품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수많은 기회를 놓고 골라서 취업하며 오늘에 이른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을 갖는 것이 합당하다고 부추긴다.

지금 그렇게 비난을 받고, 꼰대 소리를 듣는 기성세대의 수십년 전 젊은 날은 어떠했을까? 각자 개인의 삶을 평균적으로 합산할 수는 없지만, 그들 역시 그들 앞에 주어진 현실에서 하나의 줄을 잡았을 뿐이었다. 그가 태어난 세대에 그 ‘시대의 아들’로 자신의 삶에 충실히, 때로는 반항하며 지금의 세대가 되었을 뿐이다.

태어나보니 식민지 국가의 국민이었던 우리 선조들도 있다. 그 세대는 이제 상당수 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당연히 일본어를 써야 했고, 일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어떤 맘이었을까?

일제 시대에 살았던 젊은이들은 선배들에게 이렇게 비난했을까? “어떻게 살아왔기에 나라를 빼앗겨서 후손들에게 이런 나라를 안겨 줬나요?” 당시 어떤 젊은이들은 의협심에 맨손으로 만주벌판으로 달려가 김좌진 같은 독립군이 됐다. 월남 이상재처럼 이 땅에서, 윤동주처럼 일본에서, 우남 이승만처럼 미국에서 내일의 독립을 꿈꾸며 공부하던 젊은이도 있었다. 또 한편으로 이 땅에서 그 어떤 직업도 소망 없던 시대에 제복을 입은 군인이 되어 나라를 구하거나 안정된 직장을 꿈꾸며 일본군으로 자원한 젊은이도 있었다.

어느 시대나 선배들이 살아온 세상과 그들의 선택에 대해 아쉽고 서운함이 있을 수 있다. 왜 그렇게 선택했을까?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이러한 때, 우리가 참고할 한 믿음의 선배가 선택한 방법이 있다. 바벨론에 포로 신분으로 끌려갔던 느헤미야는 조국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고 망연자실하게 있다가 힘을 내어 금식하며 기도한다.

“주여! 조상의 죄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나라의 멸망으로 포로 신세가 된 지금, 누구를 탓하지 않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와 우리 조상 때문이라는 인식이다. 이 시리즈는 바로 그런 의도에서 오늘에 이르게 된 지난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보자는 의미로 시작한다. 오늘의 관점으로 지난날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며 지난날을 되새겨 보는 역사와의 대화를 시도해본다.

첫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19세기 말 조선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외국인이 발을 디딜 수 없는 은둔의 땅이었다. 더욱이 1866년 병인박해 때 무려 8000명에 달하는 천주교인이 죽임을 당한 이 땅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믿음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다. 가장 소망 없어 보이는 때, 가장 절망적으로 보이는 시기에 믿음의 사람을 통해 겨자씨 한 알이 뿌려졌다.

개신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조선을 방문한 사람은 독일 출신의 칼 귀츨라프다. 할레대학 출신의 귀츨라프는 1827년 초 7개월간의 항해 끝에 동남아 바타비아에 도착한다. 바타비아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의 옛 이름이다.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귀츨라프는 아내와 사별한다. 풍토병에 노출되어 있고 제대로 된 의료체계가 없던 시절,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목숨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그는 아픔을 딛고 사역지를 중국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그는 조선의 소식을 듣고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 암허스트호에 탑승해 1832년 2월 27일 광동(廣東)을 떠난다.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시장 개척에 열의를 보인 영국의 통상에 적합한 항구를 조사하고 통상개시를 위한 이 선박은 7월 17일 황해도 장산곶 부근에 도착한다.

▶ 조선의 첫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가
방문했던 고대도(출처: 네이버 블로그 캡처)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에서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며 가지고 간 책과 물건을 주며 접근했지만, 조선인들은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뜻 접근하지 못했다. 감자 재배법도 알려주며 접근했지만, 쇄국정책으로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조선에서 그는 사람을 만나기조차 어려웠다. 그리고 배는 남쪽으로 옮겨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 앞에 정박했다. 고대도 앞에 정박한 이후, 이들은 배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전도문서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후 귀츨라프측은 선물과 함께 조선 정부에 교역을 요구했으나, 정부의 거절로 로드 암허스트호가 이 땅을 떠나면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방문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귀츨라프는 체류기간 중 한국인들에게 인류의 구세주에 관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그들의 구세주임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하고 전도문서와 성서를 배포했다. 이 여정을 마치고 그는 항해기에 이렇게 남겼다.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이 같은 믿음의 기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금씩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 선교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해 한국에 입국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를 통해 세워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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