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북한 땅을 지킨 그리스도인 조만식

▲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 중 한 사람 조만식 장로. 출처: 고당 조만식 기념사업회 캡처

우리는 지금 이념의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등으로 혼돈스러운 시대 한복판에 서 있다. 우리는 이때 누구를, 무엇을 주목해야 할까? 성경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한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선조를 통해 이 땅을 이끌어 오셨다. 이때 우리는 그 믿음의 선배가 걸었던 그 걸음을 통해 시행착오를 발견하고, 오늘 우리가 나아갈 바를 얻을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 전문지 월드뷰 2021년 1월호는 지금 우리가 주목할 선각자 가운데,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활동한 그리스도인 고당 조만식(1883-1950)을 제시하고 있다.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명예교수, 교회사)가 집필한 기고문을 재구성, 혼란스런 이때 그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배우고 간직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짚어본다.

매일 새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성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서북지방 평안남도 강서에서 1883년에 태어난 조만식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그의 진가는 해방 이후에 드러났다. 당시 남한에는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등장, 정당을 만들고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북한에는 오직 한 사람 조만식 장로가 존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조만식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하나님이 이북은 다섯 도를 조만식 한 사람에게 맡으라고 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거대했다.

해방 직후 북한을 점령하기 위해 진주(眞主)한 소련은 조만식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따라 준다면 대통령 직을 줄 수 있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가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이 아님을 알고 거절했다. 결국 조만식은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어 있다가 1950년 6.25 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을 하던 공산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격동기에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이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사라지면서 당시의 많은 지식인이 그러했듯 서당을 그만뒀다. 그리고 그는 평양에 가서 장사꾼의 길을 선택했다. 어느 정도 장사에 성공하면서 술과 노름에 빠졌던 그는 1904년 러일전쟁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동료 장사꾼 한정교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던 그는 1905년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문물을 배울 것을 결단하고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 교장 베어드 선교사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물려받으며, 그는 매일 새벽 기도의 자리에 나아갔다. 일본 패망의 소식을 듣고는 바로 뒷산으로 올라가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소련군 환영대회서, “조선 해방은 하나님의 은혜”

해방 이후 소련군이 그를 회유하기 위해 초대한 요리집에서 그는 술을 권할 때마다 자신이 기독교 장로라는 이유로 분명하게 거절했다. 공개적으로 기독교인임을 밝힌 그는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진행된 소련군 환영대회에서도 변함없는 태도를 보였다. 김일성은 입이 마르도록 소련군을 찬양했지만, 조만식은 오늘의 해방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조선 민족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선이 독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조만식을 오늘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조만식은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 북한에 남은 신앙인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소련군이 진주, 전 국토를 공산주의 식으로 개조하던 시기에 북한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월남했다. 북한 공산정권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개인 토지를 무상몰수하며, 개인의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산주의의 횡포에 1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고향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조만식에게 월남(越南)을 권유했다. 그는 자신마저 남쪽으로 내려가면 북한에 김일성을 견제할 사람이 없어질 것으로 우려했다. 이는 북한을 통째로 공산당에게 바치는 것과 같다고 여기며, 북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그는 온몸으로 북한의 공산화를 막았다.

둘째, 수많은 기독 독립 운동가들이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을 버렸지만, 조만식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1885년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며 시작된 한국선교를 통해 많은 선각자들이 우리의 소망은 기독교에 있다고 여겨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여운형 등이 일제 치하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출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점차 상당수의 사람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만나며 기독교 신앙을 떠났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오산을 떠나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된 조만식은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셋째, 조만식은 다음세대를 세우며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남강 이승훈이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세운 오산학교에서 그는 교사로 나중에는 교장으로 봉직했다.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을 가르쳤다. 또 평양에서 숭인상업학교를 세우고, 조선의 경제를 이끌 수 있는 인재 양성에도 기여했다. 조선에 대학을 만들 수 있다는 일본의 정책전환을 보며,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시도했지만 결국은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처럼 당시 미국 등지에서는 외교를 통한 독립을 펼치고, 중국에서는 일본군과 마주 싸우며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했지만, 그는 국내에서 실력을 가진 다음세대를 양성하는 것으로 독립을 준비했다.

자유민주주의 위해 ‘미국과 손 잡아야’

넷째, 한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자유민주주의임을 믿고 실천했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웠고, 일본 유학시절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민주주의)’라는 근대교육을 경험했다. 이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분명하게 경험하며, 개인의 자유, 소유권의 확립, 종교의 자유와 같은 인간의 기본권을 강조했다. 그는 해방 이후 한반도의 통일과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이 소련이며, 그들의 공산주의와 그들의 대리인 김일성이라고 생각했다. 해방 후 북한에 있었지만 그는 남한의 미 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해방 이후, 일본에 대해 관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에 수백만 명의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데 조선에서 일본인을 박해한다면 동일하게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박해를 당할 것으로 우려했다. 그는 맹목적인 반일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자본주의의 병폐도 간파해 언제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혼란한 시대는 옛 일을 잊고,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 때 맞게 된다. 사사기 2장 10절은 “그 세대의 사람도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며 불행의 원인을 밝힌다. 그리고 11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으며”, 그 결과, 13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그들이 대적을 당하지 못하게 되는” 불행한 역사를 맞게 된다. 오늘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이 오늘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방향이다. [복음기도신문]

김갈렙

<저작권자 ⓒ 내 손 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문의: gnpnews@gnmedia.org

[관련기사]
美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은 치열한 장진호 전투의 한 장면
아르메니아를 보며 까레이스키를 떠올리다
세뇌된 대한민국, 깨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