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선 칼럼]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 오후경

이 글은 저 개인이 볼 때에 중요합니다. 우선 선교를 위해서는 흔히 서구 유럽의 제국주의적 선교의 모습을 그치고 개신교의 선교원론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논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 문화,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적 선교원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어떻게 무엇을 교육해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됩니다. 참된 기독교인, 즉 순교를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사람을 양성하려면 신자 스스로 역사, 문화,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선교사님들만이 아니라 목사님들께서도 주의 깊게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민족, 나의 나라, 그리고 선교를 생각하며 글을 썼습니다.

(고전 15:10, 개역)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NKJV)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ward me was not in vain; but I labored more abundantly than they all, yet not I, but the grace of God which was with me.

然而我今日成了何等人,是蒙神的恩才成的。并且他所赐我的恩,不是徒然的。我比众使徒格外劳苦。这原不是我,乃是神的恩与我同在。

이것은 내가 선교를 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내 생각은 선교사가 선교할 때에 선교지의 사람들을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하게 선교를 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하는 것이 된다.

1. 역사

가. 개인의 역사

사람은 먼저 역사를 알아야 한다. 나는 임천(林川) 조(趙)씨이다. 임천 조씨의 조상은 중국의 송(宋)나라를 세운 조광윤이다. 그의 손자 중의 어떤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그래서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 과거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사위가 임천 조씨라고 한다. 후에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대원군의 사위에게 백작(伯爵) 칭호를 수여한다고 할 때에 이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현재 동덕여대는 임천 조씨 문중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내가 아는 나의 가문에 대한 대강의 줄거리이다.

이런 이야기를 아는 나는 중국에서 선교할 때에 중국인들에게 나의 조상은 중국 송나라의 태조인 조광윤이라고 하고 옛날로 따지면 나는 황족(皇族)이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 이런 이야기가 먼 옛날의 이야기이기는 해도 현재를 사는 나의 마음속에는 이런 내용이 늘 들어있다. 그러니까 가문을 먹칠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나름 명예를 지키며 산다.

나. 민족의 역사

잠시 내가 개인의 역사를 말했지만 사람은 민족 전체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람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그 공동체는 하나의 언어로 보다 큰 사회와 국가라는 조직을 이룬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국가와 민족이 사람이 구성하는 조직에서 배타적 영역에 속한다. 즉 이것보다 더 큰 범위는 없다. 그러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연합(United Nation)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나라보다 더 큰 개념의 조직이 있었다. 그것은 제국(Empire)이다. 제국은 강성한 나라가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이루는 조직의 개념이다. 제국은 다른 민족을 억압하여 구성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로마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도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을 때에는 정복인과 같은 법적 기능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는 초기에 사비족을 정복한 이후, 그 다음에 왕이 사비족에서 나왔다. 그 왕은 사비족을 위한 왕이 아니라 자기 족속과 병합된 로마 전체를 위해 일했다. 현재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동독 출신이다. 그러나 그녀는 통합된 독일을 위해 일한다. 한국이 북한을 흡수 통일한 후에 다음 대통령이 북한 출신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더욱 세상을 한 번 흔들만한 능력을 갖춘 것이 될 것이다. 반도국인 로마도 세상을 한 번 흔들었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는 없다.

다. 선교지에서

선교를 하면서 중국의 조선족 기독교인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가정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르치다가 한국 역사에 관한 예를 들었는데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중국 정부에서는 조선족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조선족 자치주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족의 역사는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중국 정부의 고도의 정책이다. 그들은 소수민족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민족이든지 자신들의 역사를 알게 되면 결국 그 역사를 따라서 분리, 독립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를 날을 잡아서 성경 대신 조선민족의 역사를 강의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강의 한 후에 철학과 교수 부인 한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젊은 지도자들은 다음에 시간을 다시 만들테니 자신들의 지역에서 청소년 학생들에게 조선민족의 역사를 강의해달라고 했다. 역사를 모르는 그 학생들은 부모들이 돈 벌러 한국에 가고 조부모나 친척들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술과 담배와 마약과 도박과 성에 빠져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후 이상하게도 4년 동안 조선민족의 역사를 혼자 연구했다. 그리고 조선족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그 때에 신학생들 가운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아래의 글에서도 강조하는 역사와 문화와 예수님을 다 가르치고 난 후였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좌표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현재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한국에 있으니까 한국의 역사가 그냥 자신들의 것인 줄 안다. 그렇지 않다. 역사는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사실 역사를 아는 것이 아니다. 나는 4년 동안 한국 역사를 공부한 것 때문에 인정을 받아 선양에 있는 한국국제학교에서 사탐 선생이 되었다. 그때에 학생들에게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는데 눈빛이 변하는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도 자신의 위치를 찾은 것이었다.

2. 문화(文化)

가. 몸에는 문신(文身), 정신에는 문화(文化)

두 번째로 볼 것은 수평적인 부분이다. 이것은 문화를 통해서 구성된다. 내가 누구인가?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땅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러분은 문신을 알 것이다. 문신은 몸에 새긴 것이다. 이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문화는 정신에 새겨진 문신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나. 음식의 문화코드(culture code)

한국인이 외국에 가서 오래 살면 김치, 된장찌개 등등 한국 음식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오랜 만에 그 음식들을 먹게 되면 울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 문화에서 만들어진 것이 맛으로 마음에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치즈, 우유, 햄버거 먹어도 육체의 생명에는 아무 문제없다. 그런데 한국인은 김치, 된장찌개를 먹어야 정신이 무엇인가? 를 먹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18년을 살면서 선교하다가 추방된 나는 중국 서민들이 먹는 마라탕, 지찌아, 로우추완, 따오샤오미엔, 주로우바이차이빠오즈, 여우티아오 등등의 음식이 그립다. 나는 그것을 먹어야 선교사로서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국으로 추방 된 이후 아주 오랫동안 그 음식들을 먹지 못했다.

다. 해외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녀를 한국보다 더 선진화된 나라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기왕이면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여 살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서 정말 생각한대로 자녀가 행복해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가 알기로는 거의 없다. 가장 구체적인 것이 미국으로 가서 사는 것인데 그 삶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요즘 「미나리」 라고 하는 영화가 화제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그 영화는 이민 가서 느끼는 삶의 애환을 그린 것이다. 이민 가서 행복하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나는 선교사들 가운데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을 거의 잘못된 교육방침이라고 본다. 현재 선교사 자녀들을 말하는 MK(missionary kids)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는지 모른다. 그것은 문화적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해서 자라났는데 정작 그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류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모의 나라가 자신의 문화영역인가 하면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문화적 정서가 와 닿지 않는다. 그러니까 교육계에서는 TCK(Third Culture Kids)라고 해서 제 3의 문화를 말하는데 그것은 그 문화가 실천될 땅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허상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정확하게 보지 않고 TCK라고 해서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은 매우 염려가 된다.

직장이 외국에 발령이 난다든지 해서 가족이 외국에 살 경우 혹은 유학을 하여 보다 많은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에 대해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문화에 휩쓸려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나의 자녀가 한국어를 못하고 영어를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말라. 영어를 잘하게 하기 위해 자녀의 혀를 수술케 하는 부모가 있다는 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미국인과 영국인의 영어가 다르다. 어떤 것은 단어도 다른 것을 쓰고 발음도 다르다. 그러면 우리 한국에도 한국의 영어가 있다. 서울대에서 시험 보는 TEPS라는 것이 있고 영어권 유학을 위한 TOEFL이 있다. 공무원들은 공무원 영어 시험이 따로 있다. 한국에는 한국의 영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라. 바울의 언어와 문화

외국에서 삶을 살았던 사람가운데 내가 즐겨 인용하는 사람은 바울이다. 그는 길리기아의 타르수스 출신이다. 유대인으로서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그에게 히브리어를 모국어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교육은 당시 로마의 보편어인 헬라어를 가르쳤다. 그러니까 바울은 두 언어가 만드는 문화에 혼돈을 일으키지 않고 마치 예수님의 신인양성 교리처럼 두 언어와 두 언어가 만드는 문화를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알았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한다. 우리들 가운데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어와 영어에 정통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자신을 한국인 중의 한국인이라고 말할 사람이 누구인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자녀를 키운다면 바울처럼 키워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하지 마라. 한국에서 키워도 요즘은 역사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문화도 이상한 것이 많아서 위험한데 하물며 내가 알지도 못하는 땅에 자녀를 던져 놓고 잘 되기를 바라는가? 내가 붙잡고 키워도 제대로 자랄지 의문인 자녀들을 그렇게 키워서는 안 된다. 한 마디 더하자. 자녀는 부모와 함께 하며 자라는 것이 가장 건강하다.

마. 언어와 문화의 관계

그리고 문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언어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 그 언어로 어떤 문화인가? 정해진다. 예를 들어 미국인은 미국 영어를 쓰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한국어를 사용하기 때문이고 중국인, 일본인은 중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언어는 단지 사상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민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도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나누심으로 이 세상에 여러 민족을 구성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에서 계속될 것이다.(계7:9)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그 언어가 미치는 연계된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것이 민족이다. 이때에 사람들은 같거나 유사한 생각들을 공유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

가. 예수님: 영원의 다가옴

이제 한 가지 더 할 것은 예수님이다. 역사는 시간의 수직적인 성향을 통해 사람에게 정체성을 갖게 한다. 문화는 언어를 핵심으로 하여 공간의 수평적인 정체성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이제 기독교의 예수님은 영원으로부터 나의 정체성을 갖게 한다. 예수님 자신이 영원으로부터 시공의 세계로 들어오신 분이다.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무엇인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신을 아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의식이 있는 사람은 역사와 문화를 인식한다. 즉 시간과 공간을 인식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영원으로부터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의 성령님이 내주하는 존재이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영원을 인식한다. 그리고 시공의 세계에 있지만 영원을 감지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바로 예수님을 통한 영원의 접촉에서 이루어진다.

나. 완전한 감동: 신이 인간이 되심

제 2위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를 정말 알 정도가 되어야 사실은 참된 신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그 분이 왜 인간이 되셨어? 그게 구원하고 무슨 상관이야?”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 되어 많이 울었다.

그리고 한 때 나는 살짝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예수님이 그냥 인간으로 보였다. 그래도 많이 울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선하신 분이 억울하게 배반을 당하고 기득권 세력에 죽임을 당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유주의 신학은 대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혹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정도의 관점을 갖고 있다. 예수는 선한 선생이고 인간이 따라가야 할 모범으로서 생각한다. 그의 믿음이 세상을 이긴 것처럼 신자들도 인간 예수의 세상 승리를 따라 그렇게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면 창세기 3장 15절과 연관하여 보아야 한다.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NKJV)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you and the woman, And between your seed and her Seed; He shall bruise your head, And you shall bruise His heel.“

인간의 구원은 여자의 후손이 이룬다.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이 이루는 것이라며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구원은 정확하게 하나님이 이루신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신자는 이것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 전에는 참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신자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맞는 말 같은데 아니다. 만일 그 신자가 자신의 성결한 생활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즉 그 안에는 아주 묘하게도 자신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는 의식이 숨어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럴 듯 해보이기 때문에 같은 기독교인들도 그 사람의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신앙이 아니다. 사람 자신이 만든 신앙이다.

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쉬운 것 같은가? 기다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다릴 수 없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그런 경우들이 있다. 지금은 군대가 1년 반 정도의 복무이지만 이전에는 3년이었다. 그 동안에 여자들이 다른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래서 분노한 병사가 총을 들고 탈영하여 인생을 망치는 경우들도 있었다. 기다릴 때 정말 상황이 많이 변한다. 그 수많은 변동 앞에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이 쉬워 보이는가?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사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왜 그러셔야 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은 그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정말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변동하는 존재이고 이익과 쾌락을 위하여 상황만 허락한다면 무섭게 돌변하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이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하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정말 철저히 악한 존재이고 문제가 있고 결코 인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고백했을 때에, 그 때에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부수고 인간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상징이다. 우리는 그렇게 죽어야 할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가 죽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우리도 부활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창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와 같이 성경이 말씀하는 구속 혹은 구원의 역사로서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 진 후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성결한 노력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근본부터 잘못된 것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보는 관점이다. 이런 전제(premise)에서 구성된 신학은 신자들에게 잘못된 신앙을 심어준다. 그래서 큰 문제이다. 선교와 목회에서 예수님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정확한 이해와 믿음을 가진 선교사와 목사와 교수가 설교하고 강의하여야 한다.

4. 적용

가. XYZ 수학처럼

이것을 수학으로 보자.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갖는 사람은 바로 수학에서 X축과 Y축과 Z축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X축은 시간의 수직적인 역사이고 Y축은 공간의 수평적인 문화이다. 그리고 Z축은 영원으로서의 예수님과의 접촉이며 성령의 내주이다.

일반인들은 X축과 Y축, 즉 역사와 문화를 알아도 변한다. 사람이 그냥 막 사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알고 자신의 좌표에서 사는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역사는 시간의 수직이고 문화는 공간의 수평이다. 이 둘을 다 알면 우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안다. 즉 시공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영원의 하늘로부터 오는 Z축의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과 무한의 좌표가 나온다. 그 때에 인간은 비로소 우리들 자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나. 유대 역사에서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그들의 나라 이스라엘을 세웠다. 이것은 일반인이 볼 때는 기적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세운 유대인이란 실제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 유대인이 나라를 잃은 것은 기원전 586년이었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유다왕국은 유다 마카비 혁명에 의해 잠시 나라를 회복했지만 그 후 전혀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2500년이 지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그들의 옛 땅에 세운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영토가 없이 민족이 2500년 간 유지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루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유대인 자손이 유대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13세에 창세기부터 신명기로 구성된 모세오경을 히브리어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것이 가능하려며 그 부모가 자식에게 반드시 히브리어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어가 그 자손의 모국어가 되어야 한다. 미국에 살든 영국에 살든 호주에 살든 어떤 나라에 살든 정말 야훼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인이라면 반드시 그 자녀로 하여금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이 일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 자녀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모세오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절대로 믿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아는 신앙이 된다. 게다가 모세오경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어를 익힌 유대인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 절대의 신앙과 조상들의 역사를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씀드린 것은 언어는 문화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했다. 언어는 문화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역사와 문화와 하나님이란 삼위일체의 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수천 년이 지나도 민족으로서의 공동체를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외부에서 보면 이것은 기적이다. 그러나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당연하다. 유대인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기능을 해내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인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유대인이 역사와 문화와 하나님인 것처럼 기독교인은 역사와 문화와 예수님이다. 유대인보다 더 분명하게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것이 예수님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정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유대교보다 더 분명한 계시를 받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분명한 정체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역사와 문화와 예수님은 바로 우리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준다. 땅과 하늘 그리고 영원과 무한에 닿는 좌표가 있다. 그것을 알 때에 우리의 정체성이 분명해진다. [복음기도신문]

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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