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영 칼럼] 술술 나오는 진심

ⓒ 박계환

1. “예전엔 술집만 보였는데 요즘은 교회가 보여요. 술집도 보이고, 교회도 보여요. 이상하게 그동안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술 마시고 고개를 들면… 아, 교회가 정말 많더라고요.”

오래 전에 만난 한 청년의 이야기다. 그는 술이 들어갈 때와 맨 정신일 때의 말이 다르다고 했다. 여자 꼬시는 멘트는 아주 잘한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진심 없는 말이 싫어서 묻는 말에 단답형 대답만 나온다고 했다.

2. “난 절에 다니는데 왜 목사님 생각이 날까요? 목사님 좀 바꿔 봐요…”

얼마나 마셨는지 발음이 불분명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J언니는 그렇게 3년을 술 마시고 늦은 시간 전화하더니 인생의 주인을 바꾸었다. 요즘은 아주 가끔 술 생각이 나는데 예전 같지는 않다고 했다.

3. “친구야, 잘 있었냐? 내가 너희 식구들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술 마셨니?”

“한잔 했지. 조만간 한번 넘어갈게. 애들이랑 같이 밥 먹자.”

초등학교 때 함께 신문을 돌린 친구, 난 등록금이 없어서 돌렸는데 그 친구는 내가 좋아서 같이 돌린 거라고 했다. 감쪽같이 감정을 감춘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건 학교를 졸업하고 17년이 흐른 어느 날 버스 안에서였다. 날 먼저 알아보고는 어린 시절의 본심을 이야기했다. 늦장가 들어 자기 닮은 딸을 낳고 벙글벙글 웃음이 많아진 친구는 이따금씩 전화를 걸어 속마음을 꺼내놓는다.

4. “잘 지내지? 목사님 계시니?”

“목사님, 저 한잔 했습니다. 제가 참 교만한 사람이에요…”

K오빠도 술을 마시면 전화를 걸어 남편을 바꾸라고 한다. 수화기를 건네면 정중하게 인사부터 한다. 그가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하는 모습이 내 눈엔 그대로 보인다.

5. “언니, 우리 신랑이 언니네 가서 밥을 해주고 싶대.”

후배가 전화를 했다. 신랑이 큰 수술을 코앞에 두고 술을 왕창 먹고 와서는 술김에 우리에게 밥을 해주고 싶다 했다나…

6. “우리 딸들이 TV 술 광고를 볼 때마다 엄마가 좋아하는 거 나온다고 말해요. 마트에 가서도 술이 진열된 곳을 가리키면서 ‘엄마가 좋아하는 거 저기 있어’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스트레스 때문에 마신 건데… 딸들이 나중에 저처럼 산다고 생각하니 두려웠어요. 그래서인지 술이 저절로 끊어졌어요.”

7. “남편이 저랑 싸운 후에 술을 사갖고 들어와 한바탕 마시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라고요. 저는 30분 듣는 것도 힘든데 도대체 누가 3시간 이상 그 이야기를 들어주나 했죠… 목사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이야기 들어주셔서요.”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전화를 걸어 평소 안하던 말, 진심이 담긴 말을 한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걸까? 술에 기대지 않고 마음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술술 나오는 그들의 진심을 듣다보면 그렇게라도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고맙고 또 고맙다. 지난주에도 술을 매우 좋아하는 청년을 새로 알게 됐는데 그도 밤늦은 시간 메시지를 보내왔다.

“술 취한 사람들 전화 받으면 힘들지 않아요? 들어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저에겐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무게로 느껴지네요.”

“아뇨. 그 무게를 저희가 짊어지지 않거든요. 혹시 이런 말씀 들어본 적 있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 그게 믿음이란 건가요…”

메시지를 몇 차례 주고받았는데 그가 주일예배시간에 나타났다. 뜻밖이었다. 조금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하루 종일 교회에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런저런 생각에 지금 저녁 먹으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오늘을 마지막으로 집에서 마시는 건 끊으려고요. 그리고 목사님이 화요일과 목요일 아침에 골목을 청소하신다고 들었는데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저도 골목청소를 함께 하려 합니다. 살아온 세월을 한 번에 바꿀 순 없지만 작은 것부터 실천해 보려 합니다. 내일부터 새롭게 다시 태어나려고요.”

“여긴 저희가 해도 충분해요. 각자 있는 곳에서 소금처럼 빛처럼 살면 그 주변이 깨끗해지고 밝아질 거라 믿어요.”

어젯밤 내가 보낸 메시지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메시지가 또 들어와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골목청소는 제가 했으니 목사님은 쉬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너무 깨끗이 치우면 골목청소로 용돈 마련하는 어르신들 일거리 없어진다고 하셔서 큰 것만 치웠어요. 저는 청소마치고 지금 출근길이에요. 기분 좋은 하루되세요.”

술술 나오는 진심을 보여준 청년은 술김에 한 말로 끝내지 않았다. 새벽에 우리 동네까지 달려와 청소를 하고 간 것이다. 결코 짧지 않은,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사는데 말이다. 밥을 해주고 싶다던 후배의 남편도 술김에 한 말을 지켰다. 우리에게 점심을 해주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밥만 먹고 가려했는데 왠지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다며…

그들의 다음이야기가 듣고 싶어진다. 술술 나오는 진심을 이제는 술 없이도 들려줄 것 같다. 사람의 진심을 마주하는 기쁨이란 이런 걸까?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복음기도신문]

지소영 | 방송작가로 오랫동안 활동하다 2013년부터 서산에 위치한 꿈의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현재는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가정예배와 성경적 성교육 강의를 하고 있다. 결혼한 이후 25년간 가족과 함께 드려온 가정예배 이야기를 담은 ‘153가정예배’를 최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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