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자 의도하는 것 자체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설득하고자 애쓰는 목적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이어야지 권력이나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세상에는 수사(修辭)가 더 있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정치도, 언론도, SNS도, 그리고 우리의 일상 대화 역시 수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도 물론 있다.
요즘 세상에서는 수사가 오히려 ‘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오늘날의 무례한 문화가 도래한 이유 중 하나가 수사라 생각하여 수사는 이제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욕보이기 위해 당신이 휘두르는 것이 바로 수사라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들을 그저 지껄이기만 하는 것이 바로 수사라 여긴다. 사람들은 또한 수사가 폭력과 증오에 불을 붙이는 등유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왜 필자는 우리 사회에 그것이 더 필요하다 주장하는 것일까?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좋은 수사가 메시지에 차별성을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수사에 능한 이들이, 그들의 의도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간에, 소음 속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
수사: 설득인가 아첨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인류는 수천 년에 걸쳐 수사를 사용해왔지만 이 단어의 정의는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다.
어떤 이들은 수사를 ‘설득’으로 본다. 다시 말해, 당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적절한 청중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이 수사라는 것이다. 이런 정의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수사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용한 설득 수단을 가려내는 능력이라 정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에 능한 이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광고 제작자들은 소비자들을 납득시키고, 엄선된 어휘로 쓰인 보도자료들은 언어의 섬세한 현(絃)을 튕겨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하지만 수사를 단순한 설득 정도로 이해하면 수사가 마치 속임수, 이단, 또는 허위의 도구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그래서 수사에 능한 이들이 거짓말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남용을 경계했다. 그는 수사를 요리에 비유했다. 요리사와 수사가는 모두 재료를 섞어 뭔가를 만들어내어 사람들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는 이들이다. 역한 냄새가 나는 고기라도 소스만 충분하다면 요리사는 사람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먹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사가도 말도 안 되는 논리라 해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하나인 ‘고르기아스’(Gorgias)를 보면 소크라테스가 수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먼저, 그저 아첨하는 류의 불명예스러운 웅변이 있는가 하면, 고귀한 수사, 즉 시민들의 영혼을 단련하여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사가 있지. 청중이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최선의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수사라네.”
그리고서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Callicles)에게 “그런 수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들어보았다면, 그런 연설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라고 묻는다. 칼리클레스는 “사실, 지금 살아있는 연설가들 중에 그런 수사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도 칼리클레스도 이상적인 형태의 수사를 사용하는 사람을 한 명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박수갈채 받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것만 말함으로 다른 이들을 향상시키기를 추구하던 수사가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이다.
분명, 그들은 바로 그분을 못 만났던 것이다.
최선의 것을 말함
소크라테스가 묘사한 이상적인 수사가상(像)에 정확히 들어맞는 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공적인 가르치심은 설득력과 권위가 있었다. 그는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쓰셨다. 그의 가르침은 실제적이었고 심오했다. 예수님은 언제 아브라함을 언급하셔야 할지, 언제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어휘를 써야 할지, 그리고 언제 논리적인 주장을 펼쳐야 할지 잘 아셨다.
그렇지만 그의 수사는 달콤한 연설이나 설득력 있는 설교 이상의 것이었다. 예수님의 주 관심은 그의 말씀을 청중의 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하나님의 진리에 맞추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눅 8:1) 최선의 것을 말씀하셨고, 청중들을 성장시키신 것이다. 그의 말씀은 실로 설득력과 권위가 있었고, 마음에 담아 둘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말씀은 선하고 진실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적 수사의 필요성
바울, 저스틴 마터, 터툴리안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적대적인 문화 안에서 청중을 얻기 위해 수사학의 도구를 사용했다. ‘변증서’(First Apology)에서 저스틴 마터는 “우리가 이 책에서 쓴 것은 아첨의 말이나 독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독자들이 엄격하고도 정확한 연구를 통해 각자 판단을 내리기를 원합니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바, 아첨의 말이 아닌 진실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수사학에서 도망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구속(redeem)해야 한다. 이는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점차 적대적으로 변해가는 이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수사가 사용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해 고려해보아야 한다.
1. 진실성 > 설득력
수사의 주된 목적이 진실된 것을 말함으로써 최선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 일상 언어에서 수사를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세상에 수사가 필요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이런 때가 곧 오면 좋겠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대면하여 말하든 SNS에 글을 쓰든,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이 진실된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추해야 한다.
2. 설득력 ≠ 거짓말
남을 설득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물론 설득이 정욕, 탐욕, 그리고 권력 관계에 의해 조종될 수 있지만,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설득할 수도 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4).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자 의도하는 것 자체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설득하고자 애쓰는 목적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이어야지 권력이나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3. 청중 + 상황
바울은 특정한 청중과 상황에 따라 그의 접근법을 달리 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 효과적인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서두르지 말아야 하고 특정한 수사학적 상황과 청중이 주는 미묘한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청중에게는 어떤 사람이, 또는 무엇이 설득력을 지니는가? 이 상황에서 청중이 내 말을 듣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상황에서 예수의 복음을 어떻게 하면 최선의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 대화든, 이러한 질문을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허위를 그저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하는 것이 수사학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수사학은 필요 없다. 하지만 수사학이 최선의 것과 진실된 것을 설득력 있게 말하는 방법을 다루는 것이라면 이렇게 소란한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사학을 이용할 수 있고, 또한 이용해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 수사학이 최선의 것과 진실된 것을 설득력 있게 말하는 방법을 다루는 것이라면 이렇게 소란한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사학을 이용할 수 있고, 또한 이용해야 한다 ”
A. 트레버 서튼 A. Trevor Sutton | 미국 미시건 랜싱에서 루터교 목사로 사역 중. Concordia Seminary에서 박사학위 과정 중. 저서로 ‘Clearly Christian과 Authentic Christianity’.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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