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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삶과 죽음

ⓒ unsplash

바울은 본래 율법주의의 심취해 있던 자였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남달리 사랑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교만의 선봉장이었습니다.다른 이를 멸시하는데 빨랐던 사람이었죠.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기독교를 매우 싫어했던 핍박자 중에 핍박자 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도를 말살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주님의 이해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회심한 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전 인생을 바칩니다. 그토록 싫어했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자신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또한 그의 인생은 “복음”이라는 두 글자로 정의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자신의 전 인생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AD 47-49, 그가 1차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 소아시아의 루스드라라는 지역에 가게 됩니다. 그 때 그의 신비한 능력을 보고 신으로 떠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담대히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그때 이를 시기했던 유대인들이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을 뻔 하게 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바로 다음날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말이죠. 이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으로 증명해 보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일시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회심 후의 그의 삶 전체는 복음 사역으로 인한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습니다. 매맞고 모함 받으며 감옥에 갇히는 삶이었죠. 그런 그가 그리스도를 믿은지 약 30년이 지난 이 순간(빌립보서를 썼던때)에도 그는 로마 군인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였습니다. 매인 몸이었죠.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매임이 복음의 진전으로 사용되는 것을 기뻐할 뿐입니다. 그는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자신을 조롱하고 핍박한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온전히 전파된다면 말이지요. 그런 그가 오늘 본문 1: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 말이지요.

1.삶은 그리스도로 정의 됩니다.

인간 모두는 어머니의 태로 부터 생명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갓난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삶을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 데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살아갈 의지를 내비칩니다. 그 아이는 그렇게 자신에게 허락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부모의 보호와 가르침을 받으며 조금씩 성장해 나갑니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설정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날 다른 곳에서 태어났지만, 삶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니깐 우리 모두는 살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장소의 틀 안에서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설정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곧 우리의 인생은 배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헬라문화에서는 산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삶은 곧 정신 또는 이성의 산물이었어요. 정신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이성을 강조한 스토아 학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삶이란 이성이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는 금욕주의였습니다. 이성을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미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의하는 행복한 삶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이 헬라철학에는 쾌락주의를 표방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토아 학파와는 다르게 감각적인 경험을 추구했어요. 그들은 정신적 쾌락을 통해 참다운 행복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삶의 방향이 감각에 입각하여 점점 흘러가게 됐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화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바로 절대 가치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간 스스로의 생각과 사상이 곧 진리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문화에 심취한 사람들은 곧 그 사상이 주장하는 목적지를 향해 점점 떠내려 갑니다. 마지막 도착지가 결국 영원한 멸망의 지옥 불인지 모른 채 말이지요.

이렇듯, 삶은 아무런 방향과 목적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삶은 내가 관심을 두는 어떠한 가치를 향해 흘러갑니다. 그러니깐 우리의 삶의 모양과 방향은 우리가 초점 맞추는 그 대상이 무엇이냐 따라서 결정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서 바울은 삶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과 그 의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게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새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삶은 곧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삶 자체가 그리스도이시다.” “삶의 의미는 그리스도이시다.” 삶의 목적 또한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그가 살아가는 이유의 본질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달음박질 하여 달려갔던 목적지 또한 그리스도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 자체였습니다.

바울의 삶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바울 신학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항상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빌립소서 2:8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리고 3:18절에서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또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진정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죄 된 옛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보시면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이지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진정한 삶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다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새로운 삶은 반드시 죽음이 전제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처럼, 나의 옛 자아가 그곳에서 완전히 죽어야만 가능한 것이지요.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은 더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를 위해 사는 것이 그의 온전한 초점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로마 감옥에 갇히어 편지를 쓰는 지금의 상황속에서도 그의 삶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하고 있습니다(빌1:12). 심지어 믿는 형제가 경쟁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그의 삶의 목적과 방향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빌1:17-18). 그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빌립보서 3:12 에서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만 자랑하는 자였습니다. 심지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매인 몸인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사로잡으신 그리스도를 더 얻기 위해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그분을 온전히 얻기 위해서 말이지요.

곧 바울에게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삶이자 그를 향해 점점 나아가는 삶이자 그를 온전히 얻기 위해 달려가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산다는 것은 매일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점점 닮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 그의 기쁨과 영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문턱 앞에 다다를 때까지 말이지요.

2.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익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아무리 젊을 때 담대하고 강해 보였던 사람도 나이가 들어 죽음을 맞이할 때 비로소 자신의 약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곤 합니다. 죽음을 거스를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하게 되죠.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이를 누구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굉장한 능력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학식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재산이 차고 넘친다고 할지라도, 덕이 많아서 사람에게 수많은 칭송을 받는다 할지라도…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빗겨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깐 우리 인생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헬라문화권에서는 이 죽음을 자유라고 여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와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플라톤과 같은철학자들은 죽음을 불완전한 육신의 장막으로 부터 구출되는 온전한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육신을 벗고 온전한 정신으로만 존재하는 “순수한 나”를 만날 수 있는 환희의 순간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구원의 순간이었습니다. 죽음 뒤에는 진정한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육신이 감옥이었기 때문에 죽음이야말로 그 매임에서 구출되어 “진정한 이성”만 존재하는, 즉 완전한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저 또한 예수님을 믿기 전에 죽음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음은 무엇인가?’ ‘나는 그저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지옥에 진짜 가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들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던 저에게 매순간 돌아오는 것은 허무함과 공허한 메아리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제게 죽음이라는 것은 그저두려운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서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마치 죽음을 통달한 듯한 말을 던집니다. 죽음의 의미를 이미 꿰뚫고 있는 듯 해 보입니다. 이는 그가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유익하다 뜻은 “뭔가 이익을 얻다,” “이윤을 획득하다” 라는 뜻입니다. 곧 바울에게 있어서 죽는 것은 이익이었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손해가 아니라 이윤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있죠.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다.” 죽음은 진정으로 그에게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소멸되거나 어둡고 암울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되려 가장 값진 분을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귀한 보석과도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자신의 주인을 온전히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빌립보서 본문을 살펴보면, 그의 생각은 이미 천국의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1:6; 1:19). 그의 미래는 이미 완전한 구원의 산 소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옛 자아를 못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위해 살았던 그는 앞으로 만날 주님을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육신의 죽음이란 손해가 아닌 진정한 유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때야 말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얻게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23절에서 “내가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고 말합니다.” 곧,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자체를 얻는 것이었죠.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바울은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원했습니다. 자신의 주인과 완전한 사귐을 소망했습니다.그런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는 마치 그가 이러한 말을 던지고 있는 듯 합니다. “비록 지금의 삶 가운데 나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밖에 섬길수 없으나 죽음 뒤에는 온전히 그분을 섬길 수 있다. 비록 지금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수고와 헌신이 부분적이지만그 때에는 온전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부분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때에는 나의 사랑하는 주인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조우할 수 있다.”

바울에게 죽음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죽음이 유익일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저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진정으로 유익인가?’ ‘나에게 죽음이 참 이득으로 여겨지는가?’ ‘나에게 죽음은정말 얻는 순간인가?’ ‘그리스도를 얻게 되는 이 죽음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제 마음에서 이러한 고백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이 믿음은 그저 천국문을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나라의 주인되신 예수님를 향한 온전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나라에서 이 나라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와 영원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환희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가 죽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복음을 믿을 때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로 정의되 듯, 우리의 죽음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아직 죽음이 두렵기만 하신 분이 있으신지요. 죽음을 생각했을 때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으신지요. 오직 어둡기만 하십니까. 그것은 아마도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지 않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죽음을 생각했을 때 한없이 약해지고 확신이 무너지십니까.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으신지요.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산 소망이되어 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당신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시고 마음으로 그 죄에서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진정으로 믿으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오직 이 길밖에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당신의 삶과 죽음의 방향성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향하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얻게 되는 그 순간까지 말이지요. [복음기도신문]

강민구|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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