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어둔 그늘 ‘결핵’을 몰아낸 의료선교사

우리나라만큼 선교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나라가 또 있을까? 사회 각 영역에서 하 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변화와 회복의 축복의 통로는 일일 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근대 한국 사회에서 치명적인 질병의 하나로 여겨온 결핵 퇴 치에도 주님은 아름다운 복의 통로를 세우셨다.  <편집자>

결핵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염성이 강한 감염 질환이다. 우리나 라는 한 때 ‘결핵 왕국’으로 불릴 만큼 결핵 환자가 많았고, 이로 인한 사망률도 세계 최고였다. 사람들은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신에 의존했고, 구한말 조선의 주술 사들(무당)은 ‘결핵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수일 동안 굿을 하며 환자들의 몸을 불로 지져댔다.

이런 어둠 가운데 있던 이 땅에 결핵을 이 길 의술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섬김을 베풀 사람이 1893년 서울에서 선교사 자녀 (MK)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셔우드 홀. 그는 의료선교사로 조선을 찾아 온 제임스 홀과 로제타 홀 부부의 첫째인 동시에 조선 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신생아였다. 조선의 아이들과 함께 조선의 문화 가운데에서 조선말과 글을 배우며 자라던 소년 셔우드 홀은 서양으로 돌아가 사업가가 되 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열네 살이 되던 해, 평양대부흥의 불씨가 되었던 닥터 하디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큰 감명을 받아,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특별히 결핵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머니 닥터 홀 부인을 도와 약 을 짓고 환자를 돌보던 김점동(세례명 에 스터)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였다. 한국에 돌아와 10년째 병원과 성경학교에서 열정을 다해 봉사하던 그녀는 조선이 일본과 합병되던 1910년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조선에는 결핵을 치료 할 요양원 같은 시설은 전혀 없었다. 셔우드 홀은 ‘조선회상’(좋은씨앗刊, 2003) 에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내게 에스터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할 수 있는 가장 황금기의 인생을 맞고 있었던 에스터. 그녀를 이 세상에서 앗아갔고 그녀가 사랑 한 수많은 동족들의 생명을 앗아간 병. 나는 이 병을 퇴치하는 데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올 것과 결핵 양원을 세우기 로 굳게 맹세했다.”

이후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마친 셔우드 홀은 그의 아내 메리안 홀과 함께 1925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닥터 셔우드 홀 부부의 첫 부임지는 황해도 해주였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1928년 해주 구세요양원이 세워졌다.

셔우드 홀 부부는 보이지 않는 싸움을 싸워야 했다. 특히 질병과의 싸움도 힘겨웠지 만, 조선 사람들의 무지와의 싸움은 더욱 힘겨웠다. 많은 환자들이 결핵을 치료받고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가족들은 정말로 폐병이 나았다고 믿어주지 않았다. 다시 무당을 부르거나 가족과 격리되어 불결한 곳에서 생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주위의 불신과 천대 속에서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조선 수탈이 극심하여 생활고에 허덕이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결핵환 자는 함경도에서만도 3만 여명이 넘어섰고 전국적으로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섬기기에는 재정과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 현실의 높은 장벽과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셔우드 홀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그는 결핵에 대한 교육에 힘쓰면서, 환자들이 완치될 수 있고 적응할 수 있도록 촌락과 농장을 마련해 공동체를 꾸려갔다. 또한 덴마크와 미국에서 결핵환자를 위해 많은 성과를 올린 크리스마스실 운동을 일으켰다. 크리스마스실 운동에 대해 조선인들은 여전히 “그들은 형벌을 받아 병에 걸린 사람들인데 어째서 이미 정해진 그들의 운명 을 방해하려는 것인가?”라며 여전히 냉담 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결핵을 몰아내는 데 큰 힘을 발휘한 최초의 조선 크리스마스 실이 1932년 12월 3일 발행되 었다. 이후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추방되던 1940년까지 9차례에 걸쳐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 많은 조선의 결 핵환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

이후 닥터 셔우드 홀 부부는 사역지를 인도로 옮겨 그곳 의 결핵환자들을 24년간 섬겼다. 1984년 11월, 91세의 닥터 셔우드 홀과 88세인 그의 아내 닥터 메리안 홀은 대한 결핵협회의 공식 초청을 받아 44년 만에 그토록 그리워했던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 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나는 지금도 한국을 사랑합니다. 내가 죽거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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