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평생 부담인 언어 관점에서 바라보다
선교사가 평생 갖게 되는 부담 중 하나는 언어이다. 소수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언어의 불편함’은 선교사의 시작단계 뿐 아니라 은퇴할 때까지 따라온다.
선교사로 26년을 넘게 살고 있지만 나도 예외가 아니다. 카렌족 선교사로 언어에 대한 부담은 살아갈수록 이 더 증가된다. 카렌어는 물론이고 태국어와 영어까지 해야 한다. 하루에도 4개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날이 적지 않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피하고 싶은 상황이 여전히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1955년 해방 후 최초로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최찬영 선교사는 특별한 분이다. 아시아 태평양 성서공회 총무로 섬기면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행사한 분이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언어능력이 출중하였기 때문으로 보이다. 그는 한번도 스스로 언어를 잘한다고 하지 않았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몇 번 그분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사실 저는 언어를 잘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준비가 안되고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저는 너무 부족한 사람인데 너무 과분한 자리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영어와 태국어는 물론 일본어와 중국어도 가능했다. 특히 영어와 태국어 발음은 95세가 된 지금도 놀라울 정도로 유창하다.
그의 언어적 능력을 처음 알아본 사람은 미국 선교사였다. 최찬영 선교사가 1957년 방콕 2교회 목회자로 임명된 것은 그의 의도와 관련이 없었다. 어니 퍼그라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대표가 그를 추천했다. 당시 방콕 제2교회는 200여명의 성도들이 있었다. 미국장로교 선교사가 70명 정도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이 교회에 출석했다. 최찬영 선교사는 31세로서 나이도 어리고 선교지에 온지 1년밖에 안된 신참 선교사였다. 더욱이 태국보다 가난한 한국에서 온 선교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찬영 선교사를 적극 추천, 영적인 목자로 세웠다. 영적인 면도 물론 보았겠지만 언어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찬영 선교사의 언어능력을 알아본 현지 지도자가 있었다. 당시 태국기독교총회 총회장이었던 푸앙 목사였다. 31세의 젊은 한국선교사를 눈 여겨 본 것은 두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그의 설교에 능력이 있었다. 내가 만난 최찬영 선교사는 자신에 대한 그런 평가의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흥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성봉 목사,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많이 참석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한 과목만 공부하였지만 유명한 부흥사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를 배웠다고 했다. 부흥 설교가 그의 몸에 배여 있었다.
둘째 이유는 최찬영 선교사의 언어 능력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번 실험적으로 시켜보았다고 한다. 이후에 푸앙 총회장은 학력이 높고 경험이 많은 서양선교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젊은 최찬영 선교사를 초청, 전국을 다니면서 설교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총회 주관으로 하는 기독교학교에서 1주간 집회의 강사로 참석했는데, 소문이 퍼져 나갔다. 한국에서 온 젊은 선교사가 설교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 선교사단체에서도 그를 초청했다. OMF, WEC, C&MA에서 최찬영 선교사를 초청, 강의를 맡겼다. 현지교회는 물론이고 선교사를 위한 집회에서도 초청, 말씀을 선포하게 했다. 선교사를 위한 집회에서는 영어로 설교하였다. 이런 소문이 이웃나라까지 퍼졌다. 캄보디아에서 사역하던 C&MA 선교회가 그를 부흥강사로 초청하기도 했다.
“Koreans Missionary coming”
1958년 2월 캄보디아에 초청받고 갔을 때 영어로 된 매거진에 위와 같은 제목이 있었다. 당시 한국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가난하고 척박하고 불쌍한 후진국 국가였다. 그런데 한국보다 부유한 태국교회는 물론이고 선진국인 미국선교사들이 그를 영적인 지도자로 받아주었다. 그의 영성과 언어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찬영 선교사가 1955년 파송 예배를 드린 이후 66년이 지났다. 이후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60여년만에 극도로 가난한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선교규모와 재정 능력은 비교불가 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한국교회의 희생의 결과다. 그런데 그 이후 한국 선교사들의 언어능력은 어떨까?
가끔 선교사들의 현지어를 들을 때 내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있다. 현지인들은 소위 ‘현지어’를 사용한다는 한국 선교사의 통역이나 안내를 거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단기팀은 선교사들이 단지 한국어가 아닌 말을 하는 것 자체로 감동을 받는 것 같다. 그들의 기준은 현지인들이 이해 정도보다는 선교사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선교사 본인도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본인이 원치 않았지만 현지인들과 선교사들이 초청하고 강사로 세운 최찬영 선교사와는 다른 모습이다.
태국선교사들은 태국어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을 마친 후 사역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 과정은 대체로 1년에서 2년 시간이 걸린다. 물론 언어훈련만 집중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경우다. 소수부족 선교사들은 소수부족 언어를 위해 다시 2년 내외의 시간을 투자한다. 태국어 초등학교 6학년을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설교를 하고 강의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나의 경험을 보았을 때 10년은 지나야 강의가 가능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언어는 자신이 없다. 아침에 한글로 성경을 통독한 후 일정 분량의 성경을 4가지 언어로 읽는다. 카렌어와 태국어를 읽을 때 여전히 생소한 단어를 발견하곤 한다. 아직도 능숙한 현지어 능력은 멀었다고 생각된다.
2000년 이후 한국 선교사들의 숫자가 증가했다. 일부선교사들 가운데 우려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태국어를 제대로 연마하지 않고 사역을 시작했다. 일부는 한국어나 영어로 의미 있는 사역을 할 수 있다. 교육사역과 지역개발은 현지어가 약간 부족해도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한인들을 위한 사역도 일부는 필요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역들은 현지어가 필수적이다. 일부 선교사들은 현지언어를 잘 못하는데 교회개척을 하고 심지어 신학교 사역을 한다고 한다. 내 문제는 아니지만 걱정이다.
잠시 선교지를 방문하는 단기팀은 선교사의 언어능력을 잘 평가할 수 없다. 후원교회도 잘 모를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언어훈련을 위하여 현장의 팀이나 구조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선교사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 그것을 위한 언어 훈련 과정을 소홀히 하면 하나님의 뜻을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단기팀을 인솔하고 건축 지원에 관한 것은 할 수 있다. 선교지에서 인사도 나누고 일상적인 생활은 가능하다. 그렇지만 성경을 강해하고 기도하며 영적인 도전을 주는 것은 언어훈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부끄럽지만 나도 이런 시간들이 있었다. 돌아보면 현지인들보다 내가 중심이 된 미성숙한 자세였다.
언어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는데, 조급함 등의 이유로 사역을 시작한 선교사들을 종종 본다. 과연 그들이 현지인들이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설교와 기도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66년전 해방 후 최초로 파송 받은 최찬영 선교사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언어습득은 단순히 사역 기술을 배우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일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언어를 배우셨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에게 언어습득은 계속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다시 느낀다. 여전히 언어가 부담이 되는 한 선교사의 고민이다. [복음기도신문]
오영철 선교사 | 1995년 GMS 선교사로 태국에 파송된 뒤, 현지 신학교에서 학생과 목회자를위한 교수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곳에서 소수부족인 카렌족교회가 주민족인 타이족을 위한 선교적 교회를 세우는데 관심을 갖고 이들을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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