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예수님이 채워져 있어서,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일을 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급한 현실이나 급한 상황이 우선 될 수 있고,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가 1등 될 수 있는데, 헌신은 주님이 우리의 제1현실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 주님의 의견, 주님의 판단이 우리 안에 깃들 때 ‘나의 판단’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으로 살아가는 헌신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60:1)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내가 갖고 있는 자원을 드러내며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입니다. 크리스천은 나의 자원과 나의 비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말씀과 생명을 비춰내며 사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은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
한 주 동안 네 가지 소식을 들었는데 하나의 메시지로 들렸습니다. 대기업 총수가 20여 년간 도피생활을 하다 남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아들이 검거되어 한국으로 이송됐습니다. 지략과 재력으로 사법당국을 피했지만 하나님의 시간표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능력이 뛰어나 잘 숨었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시간표는 맞이합니다. 성경은 그 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있는 ‘코람데오’, 주님의 판단에 근거해 살겠다는 지혜가 열려야 합니다.
김영길 한동대 초대 총장님도 소천하셨습니다. 친구와 가족들 앞에서 “나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하셨다고 합니다. “이 죽음은 영광의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이 말을 남기고 소천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입니다. ‘호흡은 멈추고, 이 고깃덩어리에서 생기는 떠나가지만, 이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나는 다시 삽니다!’ 이것이 언어의 유희였을까요, 자신감의 표현이었을까요?
총장님 마음 안에 계셨던 예수님이 분명해 보이지 않으십니까? 총장님에게 하늘 소망은 실재였습니다. 믿음은 실재입니다.
믿음이 실재인 사람만 믿음을 쓸 수 있습니다. 믿음을 쓰는 사람만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만 하나님의 의견을 반영합니다. 믿음이 실재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지 못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으면 마음이 견딜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자신이 주인되어 무언가를 쑥 해버립니다. 상황에 따라 즐거워하다가 또 힘들어 합니다. 무엇이 되면 마음이 좋았다가 무엇이 안 되면 또 마음이 오그라집니다. 그러나 천국이 실제가 되면, 주님의 뜻이 깃들지 않을 때 마음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십자가 컨퍼런스를 하는 데이빗 플랫 목사님 책은 우리 교회 필독서입니다. <팔로우 미>, <래디컬>, <래디컬 투게더>, <카운터컬처> 등은 읽어보셔야 합니다. 데이빗 플랫 목사님과 함께 선교하시던 조나단 목사님이 계십니다. 조나단 목사님이 뇌종양에 걸려 선교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플랫 목사님이 휴양지에서 치료받고 있는 조나단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주의 종들에게는 소망이 있기에, 함께 눈물을 홀리고 함께 기뻐하며 교제했습니다. 헤어지려고 하는데 플랫 목사님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목사님이 쓸쓸하게 나가시는 플랫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데이빗~” 데이빗 플랫 목사님이 뒤돌아 서자 조나단 목사님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셔〜”
플랫 목사님은 울면서 나오셨다고 합니다. 몇 달이 지나고 조나단 목사님의 병세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이 땅을 떠날 때가 된 것입니다. 조나단 목사님의 친한 지인과 친구 친척과 자녀들이 다 모였다고 합니다. 조나단 목사님의 자녀가 9살, 14살, 19살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마음이 무너지는 상황입니까? 그런데 소천하는 날, 조나단 목사님이 자녀들 손을 잡고 말합니다.
“잊지 마렴, 잊지 마렴, 잊지 마렴. 그리고 꼭 기억하렴. 하나님은 선하시단다.”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마음에 예수님이 선명하지 않고서야 죽어가는 순간에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 어린 자녀들 앞에서 눈을 감아야 하는 상황, 병들어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자녀들에게 말하는 아버지.
“잊지마렴, 하나님은 신실하신단다!” 이것이 믿음의 실재입니다. 조나단 목사님은 찬양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이 찬양의 후렴을 부르신 뒤 소천하셨습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까? 내 의견대로 사는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주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참이시고 선하시다고 믿는 인생이 하나님의 의견을 존중하고 주님의 판단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1 이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삿 5:1-2)
영솔자는 지도자입니다. 지도자가 잘 인도해서 백성들이 잘 따라갔는데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됐다고 합니다. 사실 세상의 논리로 보면 말이 잘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공동체 리더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지체들을 잘 섬기고 이끌었다면, 누구에게 박수를 쳐줍니까? 리더들과 말씀을 잘 따른 지체들에게 박수를 쳐줘야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말씀에는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합니다.
잘 인도한 지도자도 아니고 잘 따라간 백성도 아니고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와 백성을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찬송 받으십니다. 우리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과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그때 내가 스스로 뿌듯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군요’라고 말하게 됩니다. ‘주님, 찬송 받으시옵소서!’ 노래하게 됩니다. 그것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연합해 하나님의 뜻과 판단을 그대로 드러내며 삽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나로부터 비롯된 봉사나 사랑의 수고가 헌신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뜻이 그대로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이 헌신입니다.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삿5:3)
정말 위태위태한 말씀입니다. 자신의 지위가 왕보다 낮은데도 왕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위험합니다. 당시 왕은 절대 권력자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왕 앞에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왕이 볼 때 반역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만만하게 하나님이 높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지혜가 가득한 베테랑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곳으로 가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상식에 어긋나는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주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주님께서 상식과 반대되는 말씀을 하실 때 우리도 상식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상식과 지혜와 다른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나를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나를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사기 시대 유대인 랍비들의 기도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드보라는 여자입니다. 사사기 시대에 드보라가 어떻게 한 민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 사사가 되고, 왕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는지 헌신의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삿4:1-5)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또 악을 행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습니다. 야빈 왕은 철 병거 900대가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졌고 2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고 학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살려줄 통로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습니다. 당시 사람 숫자를 셀 때 여자는 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드보라가 지도자로 낙점되었습니다. 찾아보고 찾아봐도 쓸 만한 남자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드보라에게 나와 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일천 번제를 드린 뒤 하나님만 앙모한다고 고백했습다. 하나님께서 마 음이 흡족하여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재물, 자녀, 성공이 아니라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지혜’를 아람어 원어로 보면 ‘지금 듣고 있는 귀’입니다. 솔로몬은 재판을 잘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생각을 듣겠다고, 하나님 의견을 잘 알아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 솔로몬이 흡족하여 지혜뿐만 아니라 재물도 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드보라가 지도자로 낙점된 까닭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견과 판단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듣는 통로를 찾으셨습니다. 찾아보니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드보라!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생각과 의견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이었지만 하나님의 판단을 알아듣는 드보라를 사사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의견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남자들에게는 큰 약점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장점이라고 말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어떤 사안이나 어떤 사람을 보면 남자들은 즉각 판단이 됩니다. 사실은 죽을 짓인데도 말입니다.
저는 무엇을 파악하는 것에 밝습니다. 누군가 말하면 그 사람의 언어가 보입니다. 당연히 판단이 들어옵니다. 어떤 일이 될지 안 될지도 금방 보입니다. 이것이 위험한 은사인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주님을 말했지만 대부분 제 판단이고 제 의견이었습니다. 뇌수술을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 로소 주님의 의견만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관록이나 은사가 아니라 주님의 의견만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할 때 30여 명이 모였습니다. 2년 정도 지나 70여 명이 모였습니다. 제가 70명까지 성도 숫자를 샜습니다. 초창기에 우리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만 예배드렸습니다. 수요예배도, 새벽예배도 없었습니다. 제가 주님의 뜻을 들은 것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 이전에는 많은 사역을 했었습니다. 알고보니 내 의견들로 점철된 사역이었습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노력해서 한 사역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적용하기 쉬운 방법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밝은 사람인데 짜증이 많습니다. 짜증은 심리학적으로 ‘뭉쳐진 감정’입니다. 마음에 무언가 쌓여있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으니 쌓이게 하는 원인들은 아마도 교회 성도일 것입니다. 무언가 계속 쌓이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 짜증이 확 터집니다. 상황이 해소가 안 되니까 짜증이 터지고 힘들게 됩니다. 그래서 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자매, 저 공동체, 저 환경 바꿔주셔야 합니다. 꼭 바꿔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 바꿔주십니다. 제 우울은 더 깊어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의견을 주셨습니다. 짜증은 살인죄, 간음죄와 같고 지옥에 가게 할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짜증을 마음에 쌓아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견을 묻지 않고 내가 철저하게 주인되었다는 반증입니다. 그것을 깨닫자 짜증이 확 내려갔습니다. 지금도 짜증나는 구석이 없지 않지만 짜증나게 하는 어떤 사람을 봐도 짜증보다는 귀여운 구석이 훨씬 더 많이 보입니다.
집이나 회사에서 짜증스러운 그 사람을 보거들랑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픽-! 죽어야 합니다. 불만스러운 환경을 보거들랑 주님의 뜻을 반영하지 않는 나를 새롭게 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눈길과 손길을 봐야 합니다. 헌신은 하나님의 판단으로 사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주님의 의견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짜증을 쌓아놓는 것은 나의 의견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입을 다무는 것도 짜증내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화가 나서 1주일간 입을 다문 적이 있습니다. 짜증나는 상황에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나의 의견만 있고 하나님 의견은 없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의견이 필요합니다! 주님 판단이 필요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 뜻대로 내버려두지 마시고 주님의 판단이 깃들게 하시옵소서!”
자꾸 내 남편을, 내 아내를, 내 자녀를 고치려고 합니다. 알고보면 그것도 나의 의견입니다. 회개하셔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도 주님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마음을 두면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를 주님께서 고치십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문제보다 더 실제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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