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따르는 성도들이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을 선명하게 알지 못하면 다른 복음을 듣고 오히려 솔깃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속마음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에 매력을 느끼고 혹하는 우리 속마음이 들킬 때, 십자가로 달려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다른 복음의 네 가지 특징 가운데 두 가지가 6절과 7절에 나옵니다.
첫째, 다른 복음은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게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셋째,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불러옵니다. 그럼에도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다른 복음을 보고 혹하게 됩니다.
넷째, 다른 복음은 사람들의 평가나 주변 환경을 의식하게 만듭니다. 즉, 인기를 따라 살게 만듭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도 바울이 왜 굳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다른 복음을 말하는 사람도 입으로는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거룩을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신 까닭은 그들에게 복음이 실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능력이 있어도 복음이 실제가 안되면 반드시 외식(外飾)하게 됩니다. 외식은,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습니다. 주님과 멀리 있습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 그것이 외식이고 그것이 위선입니다. 다른 복음은 외식입니다. 즉, 믿음이 실제 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 1:6)
복음이 실제되지 않으면 외식을 낳는다
다른 복음은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게 합니다. 부르신 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주님을 받아들였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속히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인 그 구원이 떠나간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두 가지가 바뀝니다. 첫째, 관계가 바뀝니다. 둘째, 가치관이 바뀝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관계와 가치의 변화가 생깁니다. 관계가 바뀐다는 것은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되어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왕 노릇 하던 삶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아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자아가 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회개의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가치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내가 주인이라면 나의 꿈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아실현을 해야 한다고 교육 받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자아실현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아실현을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동기부여도 많이 하고 스펙도 쌓습니다. 그런데 정말 구원받으면 어떻게 바뀝니까? 자아 실현이 아니라 자아죽음입니다. 자아가 죽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임하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주님을 말하지만 실상은 자아실현에 급급해 하는 ‘다른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실재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른 복음’은 자아실현을 추구하게 합니다.
“목사님, 정말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 거예요?” 제가 가끔씩 받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하는 이유는 믿음이 실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 중 1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둘까요? 탐욕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죄입니다. 탐욕스러운 사람도 죄를 알고 죄책감으로 갈등하고 몸부림도 칩니다. 그러나 옛 가치는 놓지 못합니다.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은 ‘다른 복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 1:7)
탐욕은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참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크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은 진짜 복음을 ‘교란하여’ 혼탁하게 합니다. ‘교란하다’는 말을 원어로 보면 ‘자극하고 선동하고 충동질한다’는 뜻입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상실했느냐에 따라 상실감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집 한 채를 사기 당했을 때, 승진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자녀들이 공부를 못해서 대학에 못 갈 때의 상실감은 다릅니다.
강원도의 한 리조트에서 교회 집사님들과 세미나를 했습니다. 시설이 너무 좋았습니다. 집사님들이 많이 좋아하기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늘 한 번 보십시오. 7, 80m 위에 이곳보다 훨씬 좋은 에덴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새들이 날아 다니고, 폭포가 노래하듯 떨어지고, 녹색의 향연이 펼쳐진 곳이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에도 이곳 환경이 더 좋다고 말한다면 그와 같은 에덴은 실제가 안 된 것입니다. 에덴은 원래 우리 것이었습니다. 이곳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에덴을 잃어버린 것을 더 아파하는 것이 순서 아닐까요?”
‘다른 복음’은 에덴을 못 보게 합니다. 에덴은 기쁨입니다. 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에 있을 때는 기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덴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회개를 통해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해 에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덴의 기쁨을 잃어버린 우리는 에덴 밖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에덴으로 돌아가지 않고 에덴 밖에서 기쁨과 비슷한 무엇을 찾습니다. 모조된 기쁨입니다. 사탄은 에덴 밖에도 기쁜 것이 있다며 그것을 찾고 손에 쥐라고 속입니다. 돈이 많으면 기쁘잖아, 지위가 높아 지면 기쁘잖아! 그렇게 우리를 속입니다.
에덴 안에서는 출발부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덴 밖에서는 내가 노력해서 취해야 하고 따내야 합니다. 에덴의 기쁨이 있으면, 희생과 감사와 섬김과 긍휼이 따라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무언가 희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덴 밖에서 얻어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에덴 밖에서 기쁨을 얻으려는 죄성에서 빨리 탈출해야 합니다 ‘다른 복음’의 근본은 성공입니다. 사탄이 심어준 성공이라는 개념이 우리 믿음을 혼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올인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우리가 성공할거야. 하나님께 올인 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할거야.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문제 생겨서 걱정하고 있을 때, 왜 걱정하는 거야? 하나님께 가면 되잖아!’ 이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왜 그리 갔어, 하나님께 갔어야지.’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이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 이 문제 어떻게 해요!” 간절하게 하나님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기도도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문제를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달라붙어 있는 우리 마음을 먼저 떼어내야 합니다. ‘다른 복음’에 푹 빠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지만 마음에 다른 것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지만 성공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성공에 대한 욕구가 죽고, 마음에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성공 욕구를 부추기는 설교도 분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사람을 좋게 하는 설교를 분별하셔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채우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만 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남습니다. 재산도 업적도 이름도 아닙니다.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채우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교육의 목적도 하나님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7-8)
에덴을 잃어버리면 모조된 기쁨을 찾습니다
성공의 관점으로 보면 죽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니까 우리가 그곳에서 탈출하게 될거야!’ 이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사망에 이르는 엄청난 해를 입고 있어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1-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더 이상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으로만 만족하는 능력입니다. 어느 환경에 처하든지 마음 흔들리지 않고 주님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비천과 궁핍에도 처할 수 있지만 그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 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3-38)
믿음은 세상에서 이기게도 합니다. 그러나 시련도 받습니다. 죽임도 당합니다. 학대를 받기도 합니다. 돌로 죽임당하고 환난과 학대를 받는 것이 성공입니까? 톱으로 죽임당하는 것이 성공입니까? 우리의 소망은 그런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에덴’의 기쁨을 보고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기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부목사 때 1000여 명의 장로님과 권사님 앞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부목사님이 어쩌면 그렇게 말씀을 잘 하시냐’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주목했습니다. 그때 저는 죄의식을 못 느꼈습니다. 치유도 많이 했습니다.
한 집사님의 동생 부부가 임신이 안 된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온갖 의학적 방법을 동원해도 임신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분을 보는데 아기를 안고 오는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분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떠오른 이미지대로 말씀드렸습니다. “내년 이맘때 쯤 아기를 안고 을 것 같아요.” 그 분이 그 다음 주에 다시 남편을 데리고 왔는데 또 아기를 안고 오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내년 이맘 때 아기 안고 오겠어요.” 하고 축복해 줬습니다. 1년 지나서 그 부부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쯤 되면 제가 얼마나 주목되겠습니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성도들의 눈에는 제가 보일까요, 예수님이 보일까요?
인기가 좋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마음에 그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기 좋은 연예인들이 신앙 좋다고 하는 말이 잘 안믿어집니다. 그분들의 갈등과 아픔을 알지만 인기 많은 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혼탁하게 하는지도 분명하게 압니다. 제가 인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을 뻔했기 때문입니다.
연극과 뮤지컬로 선교하시는 문화 선교사님들이 사역하시는 대학로 광야에 갔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아주 좋은 도시락을 먹고 있었습니다. 어느 선교사님의 팬이 보내주신 도시락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조금 들떠 보였습니다. 제가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인기는 타인의 마음에 있는 나를 먹고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선교사의 직임은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를 심어주고 예수가 왕 되도록 해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자신이 드러나고 자신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것이 사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기 좋은 것에 마음이 움직이고 들뜨는 것을 보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복음은 성공의 관점에서 마음을 충족시켜 주기에 사람들이 혹해서 주님 앞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은 저주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사람들의 기쁨을 사고 사람들의 주목을 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쁨을 샀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저도 속에서 탐욕이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기나긴 싸움이 있었습니다. 인정 욕구, 평가, 사람들의 낯꽃이 마음에 들어와 있어서 힘들었습니다.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예수 복음’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자아가 죽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 죄가 씻겨졌고, 그래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됐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요?’ 그러나 그것은 탐욕입니다. 옛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죄 가운데 갈등하는 것이 믿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것은 죄의 갈등에서 멈추지 않고 옛 가치를 십자가에서 실제로 못 박는 것입니다. 그때만 말씀이 실제로 치유하고, 실제로 우리를 살리고, 실제로 삶에서 역사합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하나님도 부족해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찾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착하고 성품도 좋은 제 친형님과 대화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동생)목사님, 내가 50년 넘게 예수 믿었잖아. 잘 믿으려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잖아. 그런데 그것이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겠어. 마음이 왜 그토록 밋밋했는지, 감동이 없는데도 왜 그토록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힘들어 했는지 이제 알겠어. 이제 알겠어.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말이 관념이 아니어야 산다는 말을 이제 알겠어.”
복음이 실제가 되지 않으면 외식합니다. 복음이 실제 되지 않으면 더 외식하고 더 열심을 냅니다. 거룩을 말하는데 정작 마음은 세상의 성공에 가 있습니다. 모조된 가짜 기쁨을 찾아 헤맵니다. 복음은 실재 되었을 때만 실제입니다. 부르신 이를 떠나게 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희미하게 만들고, 그것이 저주인지도 모르고 세상의 조명 받는 것을 즐거워하며 살아가게 하는 ‘다른 복음’이 이제는 보여야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 죽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이라는 찬양을 오해하고 부르면 안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주님이 지셨고, 순교자의 길도 주님이 먼저 가셨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우리 자아가 죽었을 때만 그분과 연합했기에 그분이 가신 길을 뒤따라갑니다. 믿음이 실제가 안 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순교자의 길이라고 말하면 막연하게 두려워합니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은 복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눈으로 보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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