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

[GTK 칼럼]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얻는 교훈

사진: Basil James on unsplash

한국은 앞으로 다가올 선거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미국에 사는 나로서는 제한된 소식으로 많은 사람과 교제하며 소식을 나눌 수 없지만, 언론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 전해지는 소식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선거철이 되면 늘 그래왔었지만, 기독교와 교회가  종교의 한 집단으로 단지 정치인이 이용하는 일부 세력으로 취급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어떤 후보는 표를 위해서 사찰로, 누가 봐도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어떤 후보는 교회로 찾아가 표를 구걸하기에 급급하다. 물론 이러한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그들의 이런 행동에 흔들릴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이 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본질적인 사명과 생각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며 영적으로 죽어가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복음으로 무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 누구를 지지해야 하고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글이 아니다. 선거권을 가진 누구나 가족과 나라를 평안하게 이끌 바른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면 된다. 나도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특히 교회를 인도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시민권은 이 땅에 아닌 천국이다. 그러므로 천국을 기다리며 나그네로 이 땅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나는 최근 예레미야서를 읽었는데 2500여 년 전에 쓰여진 예레미야서의 말씀에서 혼란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바른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와 그가 처했던 상황은 우리들이 사는 오늘날과 너무나 다르지만, 영적인 현실은 너무나 흡사하다.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어지러운 상황에서 우리가 처해야 할 자세를 가르쳐 주신다.

나는 그 교훈을 워렌 워스비 목사님이 그의 주석 마지막에 잘 정리한 글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같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원한다.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얻는 교훈”

1. 어려운 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해야 한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항상 여러 가지의 상상을 할 수 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가 하라고 한 것을 거부함으로써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한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유다는 환난과 심판을 자초하는 죄를 범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지혜로 닥친 환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느부갓네살에게 복종하였더라면 그들의 생명과 성전과 성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박해를 받는다.

유다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편하게 살기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종의 강력한 말보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달콤한 말을 더 좋아했다. 그들은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불안의 근본 원인이었던 ‘불신’을 해결하지 않고 평화를 추구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 시대부터 사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자들을 대적했고 그들의 권위에 도전했다. 박해를 겪지 않은 선지자나 사도의 이름은 찾기가 힘들다. 예레미야가 오늘 유엔 총회나 의회에 나타나서 그가 유다 지도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말했다면 그는 아마 비웃음을 당하고 쫓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대적하는 자 없이 모두를 기쁘게 하는 ‘인기 있는 설교자’는 위험하다. 반스 헤브너는 “오늘날 종교계에서 예언자들은 거의 멸종되었다.” “현대 교회는 ‘선지자가 없는’ 조직이다.”라고 말했다.

3. 진정한 애국심은 죄를 가리지 않다. 

찰스 제퍼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예레미야)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여 반역자로서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그는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도 그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예레미야와 같은 애국자가 반역자로 불린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나 담대하게 거짓을 폭로하고 국가에 회개를 촉구한 많은 용감한 지도자는 반역자라고 불리며 공개적으로 학대를 받았다.”

진정한 기독교 애국자는 나라가 저지르는 죄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긍휼히 여기며 실제적으로 다루는 사람이다. 예수님과 예레미야는 모두 “정치적 몸”의 질병을 바르게 진단하여 유일하고 바른 해결책을 제시한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상처에 손을 조금도 대지 않고 “평화”만을 외치지 않았다. 예수님과 예레미야는 둘 다 국가의 가장 큰 문제가 실업, 인플레이션 또는 국방력 부족이 아니라 “죄”라는 것을 인식했다. 죄를 다루지 않는 나라는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며, 더 큰 “죄”로 향하는 심각한 징후일 뿐이다.

4. 하나님의 종들은 때때로 의심하고 실패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는 약했지만 사람 앞에서는 담대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그가 해야할 일을 말씀하실 때 귀를 기울였다. 한때는 자신이 하던 일을 그만둘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 자리를 고수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섬겼다.

예레미야는 마음의 선지자였다. 그는 표면적인 문제를 다루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내면을 꿰뚫어 보고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보고싶어 했다. 그는 사람들이 ‘법 궤’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필요도 느끼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고 담대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들에게 ‘돌 판’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새 언약에 참여하는 날이 올 것이다. 당시에 이것은 급진적인 믿음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종은 누구나 슬픔과 실패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를 붙드신다.

5.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이다.

오늘날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예레미야는 참담한 실패자였다. 그는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같은 사람들에게 설교했지만, 그들 중 그를 믿거나 그의 메시지에 순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는 곁에 서서 격려해 주는 친구들도 거의 없었다. 그가 멸망에서 구하려고 했던 나라는 자신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파멸에 빠졌다. 그의 이력은 대부분의 선교 후보 위원회나 보통 교회의 목회자 선출 위원회에 감명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를 충실한 종으로 보셨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모든 것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그는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브이 레이몬드가 말한 것과 같이 “끝내기에는 항상 너무 이르다.”

6. 사역에서 가장 큰 상급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라고 대답했다. 만일 사람들이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과 같습니다!”라고 한다면 그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님과 예레미야의 유사점은 흥미롭다. 가르침과 설교에 대한 그들의 접근 방식은 “행위에 대한 설교”와 일상생활과 자연의 많은 이미지를 사용한 것은 비슷하다. 둘 다 성전에서 행해지는 상업적인 “겉만 번지레한” 종교에 대해 반대했다. 두 사람 모두 동족에 대한 반역자로 기소되었으며, 체포되고 구타당하고 감금되기까지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둘 다 예루살렘을 두고 울었다. 둘 다 친척들에게 거절당했다. 둘 다 오해받고 외롭고 거부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둘 다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둘 다 외적이고 무력한 종교의 단순한 겉모습을 거부했다.

계속할 수 있지만, 요점은 분명하다. 예레미야는 “고난에 참예함”(빌 3:10)으로 예수님과 같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생명의 풀무 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롬 8:29)받은 사람이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삶에서 이런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면 이를 부인했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변화되고 있었다.

7. 하나님은 왕이시며 천하 만민은 그의 주권 아래 있다. 

하나님을 놀라게 하는 것은 없다. 그분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나라들은 결국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분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사실 빛이 클수록 책임도 커진다. 이스라엘 백성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홍수와 같이 쏟아지는 빛의 축복을 거역하였기에 징계를 받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고 그분의 뜻을 행한다고 공언하는 일에는 엄숙한 책임이 따른다. 국가가 그들의 화폐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인쇄하거나, 국기에 대한 서약을 하면서 하나님을 언급하고, 정치 캠페인 연설에서 성경을 인용하고, 모자를 벗어 하나님께 예를 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라를 높이는 것은 ‘의로움’이지 종교가 아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가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미가 6:8)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김상우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 

Print Friendly, PDF & Email

관련기사

20240517 Mary
[TGC 칼럼] 질문 잘하기: 신학자의 모델, 마리아처럼
20240517 Carnations
[지소영 칼럼] “선생님들은 강당으로 모두 오세요”
20240123 solider
[GTK 칼럼] 예수의 좋은 병사여, 함께 고난을 받으라(1)
brazil-church-woship-230523-unsplash
[TGC 칼럼] 복음은 모든 교회의 중심 고백이다

최신기사

[TGC 칼럼] 질문 잘하기: 신학자의 모델, 마리아처럼
서양 선교사들이 영상에 담은 100년전 한국…청라언덕의 사과, 한센인의 김장풍경 등
[지소영 칼럼] “선생님들은 강당으로 모두 오세요”
네팔, 오만... 한국과 외교수립 50주년
법원의 수술 없는 성별 선택권 인정... “도로 중앙선 삭제한 것 다름없다”
소비자들 LGBT 제품 거부… 기업체의 영업 전략 등 변화 가져와
[오늘의 한반도] 서울시의회, 학교구성원의 권리‧책임 조례 공포 외 (5/17)
Search

실시간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