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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의 충격, 기도와 예배의 회복만이 살 길입니다”

기도로 순종하는 최상훈 목사(화양감리교회)

최상훈 목사(화양감리교회)


– 코로나 팬데믹으로 예배드리는데 제한이 많아 어려움들이 있었을 텐데 화양감리교회는 어떻게 지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작년 1월 20명 이하로 예배를 드려야 할 때,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기도하던 중 한 명이라도 함께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방역수칙을 지켜가며 9부 예배를 드린 적이 있어요. 아침 7시에 시작해 마지막 예배는 저녁 8시 30분에 끝나는 일정이었어요. 9번의 설교가 말처럼 쉽지는 않았어요. 오후 시간이 되자 너무 힘이 들어 끝까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마지막 9부 예배를 마치고 축도할 때 눈물이 나더군요. 이렇게 드려진 예배여서 그런지 함께 예배드리던 모든 성도들이 울면서 감격하며 주님을 찬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주님이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 놀랍군요. 예배에 대한 사모함으로 하루에 설교를 9번이나 하셨군요. 그만큼 예배에 대한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코로나라고 해서 교회에서 예배와 기도가 중단된 적은 없었어요. 예배 전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고, 찬양팀 연습 전에도 기도하죠. 간단하게 기도하고 연습하자는 건 없어요. 늘 1시간씩 기도해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저희는 기도통장과 성경통독 통장을 만들어 매년 연말에 시상식을 갖고 있어요. 기도통장은 기도한 시간을 돈으로 환산해서 헌금시간에 제출하는데요, 1등은 하루에 9시간씩 기도했고, 2등은 하루에 8시간 기도하신 분들이더군요. 100등 안에 들려면 하루에 3시간 정도 기도해야 돼요. 성경통독은 30독 정도 하신 분이 1등을 했어요.”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단순하게 말씀과 기도로 순종하고 있다고 하시니 큰 격려와 함께 도전이 됩니다. 청년 성도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예배에 대한 사모함으로 하루 9부 예배 드리기도

“제가 7년 전에 이 교회에 부임했는데, 당시에는 청년들이 별로 없었어요. 첫날 청년예배에 참석하니 예배인원 전부가 18명이었어요. 예배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말씀에 대한 간절함과 사모함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날 청년예배를 드리고 자정까지 기도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도 있어 청년부를 젊은이교회로 독립시키기로 했어요. 그리고 재정지원을 중단했어요. 처음에는 청년들이 당황하고 불평도 있었지만, 담임목사의 진심이 전달되면서 청년들 스스로 교회를 세워가는 법을 찾아가더군요. 그 이후 젊은이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어요. 지금은 800명 정도 출석하고 있어요.”

– 놀라운 성장이군요. 지금 교회의 살아 있는 간증을 더 듣고 싶지만 조금 뒤에 듣기로 하고, 그런 뚝심과 결단을 하기까지 주님이 목사님을 이끌어오신 시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먼저 목사님이 주님을 만나게 되신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아버지는 공주에서 개척 목회를 하시면서 끼니를 먹지 못하는 어려운 아이들에게 밥을 해주셨어요. 교회 형편도 어려웠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밥을 해주고 나면 가족 모두는 굶었어요. 그러다 부모님에게 자녀들을 키울 수 없는 한계 상황이 왔고, 제가 4살 때 한 권사님 댁으로 가게 됐어요.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때는 많이 울었어요. 그렇게 2년을 지내다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됐고, 서울 신림동 달동네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서울로 오게 됐어요.”

– 남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셨군요. 서울에서는 어떠셨나요?

“학교 끝나면 갈 곳이 마땅치 않았고 움막 같은 집에 있는 것보다 교회 예배당에 있는 것이 행복하고 좋았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고 집에 갔어요. 짧게는 하루 1시간씩 기도했고 점점 기도의 양이 많아져 하루에 3시간, 4시간씩 기도하는 날도 적지 않았어요. 주님께 무언가 드리고 싶은데 가난한 형편에 드릴 것이 없어서 새벽에 신문 배달과 우유 배달, 겨울엔 찹쌀떡 장사를 하며 번 돈으로 헌금을 정성껏 드렸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하루에 3~4시간 기도

– 청소년이 그렇게 많이 기도를 했다는 게 놀라운데요.

▲ 기도의 삶을 독려하기 위해 마련한 화양감리교회의 기도통장.
ⓒ 복음기도신문

“기도가 쌓이면 신기하게도 능력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점차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피아노학원에 너무 다니고 싶었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개척교회 반주할 사람이 없어서 피아노학원에 다니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학원에서 가져오신 바이엘 교본을 놓고 기도한 다음 무조건 피아노를 쳤는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 반주를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학교 합창단 반주, 군대에서 성가대 반주도 했어요. 이후 여러 상황들을 거치며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쌓여진 기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겼어요. 그러다 큰 사고를 경험했어요.”

최 목사는 그동안 짬짬히 연주한 곡들을 유튜브에 올렸다. 실제 확인해 보니 파도치는 바닷가 배경을 바탕으로 잔잔한 피아노 동영상 등의 조회수가 수천 회에 달했다.

– 그런데, 어떤 사고였나요?

“1994년 막내 동생의 입대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하나님이 “상훈아, 차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가거라.”라는 마음을 강하게 주셨어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족들에게 둘러대고 차에서 내려 홀로 버스를 타고 왔어요. 그날 저녁 가족이 탄 승용차가 고속도로에서 오른쪽 조수석 쪽으로 상대차와 충돌했다는 것을 집에 도착한 이후에 알았어요.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고, 가족들은 모두 중상을 입었어요. 만약 그때 제가 오른쪽 조수석에 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 사건이 훗날 선교사로 결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어요.”

– 그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군요. 그 이후엔 어떻게 되셨죠?

“1989년 서울 감신대에 입학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신입생 등록금 인상 문제로 학내가 시끄러웠고, 제가 1학기 과대표를 맡으면서 자연스레 등록금 투쟁공동위원장을 맡게 됐어요. 한 학기 내내 학내투쟁에 전념하느라 기도생활과 영성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당시는 5공 청문회, 전교조 출범 등 사회적 이슈가 많았던 때여서, 나름 책임감을 느끼고 학생회장에 출마했는데 40여 표 차로 낙선했어요. 당연히 당선될 줄 알았는데 떨어져서 충격을 받고 학교 웰치채플에 가서 멍하니 혼자 앉아 있다가 문득 중고등학교 시절 매일 기도했던 제 모습이 떠올랐어요.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도 오버랩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동안 여러 가지 생각과 죄송함 때문에 하염없이 울다가, 휴지를 찾으려고 가방 안을 뒤지는데 예수전도단의 한 간사님이 준 봉투를 발견했어요. 살아가면서 힘들 때 열어보라고 하셨던 거였어요.”

대학교 학생회장 낙마 계기로 신앙 회복

– 봉투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었나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는데, 붉은 천 조각 하나와 오래된 못 하나가 있었어요. 계속 쳐다보다가 그 의미가 다가왔어요. 어려운 순간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박혔던 못을 기억하라고 주신 선물이었어요. 그 순간 주님이 나와 이 자리에 함께 하심이 강하게 느껴지면서 감사의 고백이 나왔어요. 이후에 입대를 결심했어요. 이왕이면 군목으로 가고 싶어 시험도 보고 설교도 합격했는데, 결국 떨어졌어요. 학생운동경력 때문이었죠. 그래서 군종병이나 군대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나 반주자로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가게 된 곳이 공병대였어요. 제 보직은 공병대 작업병이었어요. 종일 콘크리트를 만드는, 소위 공구리 작업을 했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삽질만 하면서 손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자갈을 날랐어요. ‘왜 하나님께서는 군종병에 배치해주지 않고, 작업병을 하게 하셔서 고생만 하게 하시나.’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병대에서 작업병으로 고생하게 하신 이유는 엄청난 은혜이자 배려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됐어요.”

– 하나님의 배려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해요.

“제대하고 감신대를 졸업한 후 아프리카 우간다, 케냐 선교사로 갔는데, 그곳 원주민 마을에 제대로 콘크리트 건물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이미 저를 공병대 작업병으로 보내셔서 건축의 전문가가 되게 하셨잖아요. 그 기술로 원주민 마을에 교회를 7개나 세울 수 있었어요. 이 은혜를 깨달은 후 하나님 앞에 털썩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어요. 건축방법을 전수받은 원주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영혼 구원의 역사도 일어났고, 하나님의 자녀에겐 결코 우연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어요.”

공병대 경험이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경험

– 아프리카 선교는 어떠셨어요?

“처음 아프리카 선교사역에 뛰어들 때 7년을 서원하기로 하나님과 약속했어요. 그런데 6년째 되던 해 아내가 임신 중에 그만 풍토병에 걸렸어요. 여러 병원에 다녔지만 잘 낫지 않았고, 태아도 위험한 상태였어요. ‘주님, 지난 6년 동안 교회와 학교도 세우고 최선을 다해서 선교했습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1년이 남아 있지만 임신한 아내의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일주일간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는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상훈아, 너는 남아서 너의 사명의 자리를 지켜라.’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순종하기가 참 어려웠지만, 그 말씀에 순종해서 저는 1년 동안 선교지에 남고, 아내는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보냈어요.”

– 쉽지 않은 결정이었네요.

“첫 아이의 출산을 함께할 수 없어 마음 아팠지만 순종하면 더 큰 은혜를 주심을 확실히 믿었어요. 감사하게도 지난 6년보다 남은 1년 동안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역사와 선교 열매가 훨씬 컸어요. 교회가 놀랍게 부흥했고, 3명의 마사이 원주민 청년이 신학교에 가게 됐고, 올레케뭉게교회를 통해 인근 마을까지 복음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렇게 7년간 아프리카 사역을 은혜 가운데 마치고 안식년을 겸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 더 놀라운 일이 남았나요?

“임신한 아내는 풍토병을 치료받아 완쾌됐는데 첫째 아이가 한 달이 지났는데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어요.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는데, 전신 패혈증이라고 했어요. 의사는 상태가 심해지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했고, 아이 대신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도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받으실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염없이 눈물이 났어요. 그리고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이 나왔어요. 반복적으로 감사 고백을 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2시간쯤 지났을까.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 기적같이 아이는 급속도로 호전됐고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회복돼 일주일 만에 완쾌됐어요.”

▲ 화양감리교회 성도들과 함께. 제공: 화양감리교회

<이상 260호에 게재>

– 여러 고비들이 참 많으셨네요. 아프리카 이후엔 어떤 걸음을 걸으셨어요?

“그동안 선교지에서 고생하고 아이의 병 때문에 고생한 아내가 애처로워 보였어요. 뉴질랜드에서 안식년을 갖기로 하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어요. 뉴질랜드로 떠나기 한 달 정도 남은 어느 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개인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마음속에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상훈아, 가장 더운 아프리카 지역에서 7년 동안 고생 많았다.” “주님,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상훈아, 너는 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지?” “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가장 추운 지역인 알래스카로 가서 또 다른 7년 동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야겠다.” 그런데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는데, 뉴질랜드로 떠나기 2주 전에 아내가 기도할 때 주님이 알래스카로 가라는 마음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렇게 뉴질랜드의 안식년을 포기하고 알래스카로 가게 됐어요.”

아프리카선교에 이어 알래스카로

–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계속 받으셨군요.

“훗날 이야기이지만 그날의 순종으로 알래스카에 최초의 한국 감리교회와 에스키모선교센터가 세워졌어요. 알래스카에 도착해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추운날씨를 맞닥뜨리며, 매일 저녁 예배를 드리며 이곳에 보내신 계획을 알려달라고 기도했어요. 6개월이 지나자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교회 개척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을 붙여주셨고, 유학생에 대한 비전을 주셔서 앵커리지 주립대학교(UAA)에 가서 기도를 쌓았어요. 청년 2명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새벽예배를 시작했고 새벽 모임이 부흥해 알래스카의 청년 부흥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그러나 알래스카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힘든 일도 있었어요.”

– 어떤 일인가요?

“2006년 10월 어느 날, 한 집사님 가정이 사택을 방문하겠다고 해서 평소에는 추워서 열어놓지 않던 창문을 열고 청소하면서 환기했어요. 집사님이 도착해서 우리 부부는 1층으로 내려갔고 첫째와 둘째 아이는 2층에서 우리를 내려다 봤어요. 그리고 창문 방충망을 치기 시작했어요. “엄마, 아빠.” 그런데 둘이 한꺼번에 치니까 그만 방충망이 떨어졌죠. 그 순간 아이 둘이 창문 밖에 매달렸고, 첫째 아이는 힘을 다해 매달려 있어서 다행히 구했지만, 둘째 아이는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고 머리부터 부딪혔어요. 둘째 아이는 뇌 손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어요. 그날부터 아이의 옷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했어요. 그러나 3일 만에 둘째 아이는 숨을 거두고 하늘나라로 갔어요.”

– 너무 큰 어려움을 당하셨네요.

“아이의 장례를 마치고 어두운 예배당에서 울면서 “하나님, 하나님 마음이 너무 아파요. 가슴이 막힐 정도로 너무 아파요.” 기도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내가 안다. 아들을 잃은 안타까움이 바로 내 심정이란다. 낙심하지 마렴. 너의 아들 유빈이는 지금 나와 함께 천국에 있단다. 사랑하는 상훈아. 앞으로 네가 만지는 곳마다 내가 치유하고 역사할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기도 중에 예수님의 모습과 아이가 함께 미소 짓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찢겼던 마음이 기적같이 치유됐어요. 그리고 그 무렵 미주에서 열린 복음학교에 참석하면서 힘을 많이 얻기도 했어요. 이렇게 고난을 겪고 2009년 알래스카의 첫 한국감리교회인 알라스카예광감리교회가 새성전에 입당했고, 에스키모선교센터를 봉헌했어요. 7년 사역은 그렇게 마무리되면서 이후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어요.”

–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여기에 딱 어울리는 말이네요. 이후엔 어떻게 되셨어요?

“알래스카 사역을 마칠 무렵 캘리포니아주 벤츄라감리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어요. 처음 부임하고 성도들을 심방하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한 명 한 명 듣게 됐는데, 목회자 이동의 복잡한 문제로 깊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됐어요. 이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기도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사택 문제가 원활하게 해결되지 않아 이것을 주님의 사인으로 받고, 아내와 아이는 얼바인 근처 친척 집으로 보내고, 저는 한 달 동안 교회에 머물며 예배당에서 매일 철야기도를 했어요. 기도하면서 목회를 했더니 예배시간마다 예배가 살아나기 시작했고, 성도들의 마음의 문도 열리기 시작했으며 아멘 소리도 점점 커졌어요. 부임할 때는 성도가 50명 정도였는데, 이후 6개월 만에 70여 명이 등록하고 장년이 160명 되면서 교회가 부흥이 됐어요.”

– 기도 속에서 기적 같은 회복들이 일어나네요.

“벤츄라감리교회 부흥의 원동력은 예배였어요. 그러나 ‘예배 전 중보기도회’가 그 일을 이끌었다고 생각해요. 작은 교회의 경우 예배 전 목회자가 할 일이 많고 분주하지만 기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시간을 내고 기도회를 시작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은혜와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모든 예배 전 기도회를 가졌어요. 그랬더니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부어졌고 성도들의 마음가짐도 확연하게 달라졌어요. 토요일 새벽에는 ‘온 가족이 함께하는 토요비전새벽기도회’(토비새)를 열었고, 매주 토요일 전 교인에게 안수기도를 했어요. 예배가 살아나고 기도의 양이 많아지니 성경말씀과 제자훈련에 대한 열정도 커졌죠. 그렇게 4년 6개월 만에 벤추라 시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어요.”

알래스카와 캐나다에서 목회

– 그러면 한국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2014년 미국에 있을 때 화양감리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 요청이 있었어요. 정확하게는 아버지 목사님이 저에게 묻지도 않고, 교회에 서류를 제출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부임하기 전 먼저 교회에 와서 욥의 고난에 관한 설교를 했는데, 그때 성도들이 마음에 많은 위로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청빙요청이 있어서 2주간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과 확신으로 청빙을 수락했어요. 알고보니 교회는 그전에 아픔을 경험하고, 성도들은 마음이 많이 상해 있었어요. 예배의 회복과 기도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아내와 함께 한 달 동안 하루에 10번 예배드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한번 예배를 드릴 때마다 20~30분씩 예배를 드렸어요. 하루 4시간 이상 예배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피곤할수록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어요. 교회에 부임해서 다른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만들지 않고 그냥 기도회만 했어요. 처음에 한두 개로 시작한 기도회가 지금은 주일예배 전 기도회, 예배 동시간 기도회, 어머니 기도회, 사역자 기도회, 성전 기도회, 교사 기도회 등 10여개로 늘어났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기도가 교회를 덮기 시작하면서 예배의 회복이 시작됐다는 거예요. 예배 시간마다 눈물이 마르지 않아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예배당 좌석마다 휴지를 비치해 놓기 시작했어요. 어두웠던 성도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부임하기 전까지 새가족이 전혀 오지 않았는데, 한주에 10명이 오는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기도를 쌓아 놓으면 필요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 시작할 때 나누지 못했던 교회 상황을 조금 더 나눠주세요. 그 많은 청년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지금은 해외에 나가는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니까 국내 선교를 계속 하면서 전도를 지속적으로 했어요. 연탄봉사도 나가고 서울역 노숙자 사역, 쪽방촌 전도, 소록도 사역 등을 하고, 기본적으로는 해외 40개 지역에 청년들이 매월 재정을 지원하고 있어요. 또 온라인으로 단기선교를 시도해봤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좋더군요. 캄보디아 청년들과 인터넷 화상회의로 모여 설교하고 기도하고, 통역으로 진행했지만 모두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보통 단기선교와 똑같이 몇 개월 전부터 기도하고, 단체티셔츠도 맞춰서 보내주고, 같은 마음으로 집회를 진행했는데, 공간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어요.”

온라인 단기선교, 다양한 청년활동

– 온라인으로 단기선교까지 가능하군요. 코로나 여파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청년들의 다른 활동도 있나요?

“청년들은 지금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 각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동성애 반대운동을 한다거나 낙태 반대운동 등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해 기도와 여러 활동들을 하고 있어요. 또 쇼핑몰을 운영해 그 수익금으로 선교지를 돕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사역들을 지원하고 있어요. 에스더기도운동이나 통일광장기도에서 나가서 함께 기도로도 연합하고 있어요. 참 감사한 건 청년들이 정장을 입고 출근준비를 하고 교회에 와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기도하고 출근을 해요. 화장실 청소당번을 자원해서 그렇게 섬기는 것이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뭔지 알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둔 우리가 이 땅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위의 것을 당연히 바라봐야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이렇게 자연스러운 헌신으로 나오는 것 같아요. 그렇게 각자의 직장에서 기도모임도 만들어지고 영혼구원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어요. 이들이 이제 사회나 국가에 영향력을 끼쳐 거룩한 대한민국으로 방향을 바꾸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런 부분 중 하나로 저희 교회가 기독교언론 운동도 시작하려고 합니다.”

– 기도로 불도저같이 전진하고 계시군요? 그래도 코로나에도 대응해야할 텐데요. 교회가 어떻게 대응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교회에 코로나 진단키드, 산소통, 산소호흡기, 약과 비타민 등을 준비해 놓고 필요한 교인들에게 제공해줍니다. 생활치료소에 들어갈 경우는 음식을 갖다 주기도 하고, 특히 청년부들이 지원하는 선교사님이 40여분 되는데 이분들이 한국에 와서 격리할 때는 우리가 음식을 보내드려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 보혈이 우리를 덮으셔서 인도해주셨음을 믿습니다.”

– 끝으로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몇 가지만 정리해보겠습니다. 1. 우리교회가 나라와 민족위하여 기도하고 선한영향력을 나타내는 축복의 통로 되게 하옵소서. 2. 청년들이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분명히 하게 하옵소서. “나의 본업은 복음전파입니다.”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복음 전파에 목적을 두게 하옵소서. 3. 성령의 감동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각 처, 각 기관마다 세워지게 하시고, 환경과 권력에 위축되지 않는 믿음의 발언들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4. 대한민국 학교현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교육정책들이 시행되게 하옵소서. 5. 북한공산정권이 속히 무너지게 하옵소서. 그 땅을 묶고 있는 어둠의 권세가 떠나가게 하옵소서. 지하교회 성도들이 속히 자유를 얻어 주님을 마음껏 예배하게 하시며 신앙의 자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게 하옵소서.” [복음기도신문]

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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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반도] 제주서도 퀴어행사 개최 예정 외 (5/18)
[오늘의 열방] 수단 북다르푸르주, 내전으로 56명 사망 외 (5/18)
“복음기도신문 300호, 미라클 300을 축하합니다” – 김용의 선교사
[TGC 칼럼] 질문 잘하기: 신학자의 모델, 마리아처럼
서양 선교사들이 영상에 담은 100년전 한국…청라언덕의 사과, 한센인의 김장풍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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