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폴리, 현숙 폴리 목사 부부(한국 순교자의소리)
한국인보다 한국 초기 그리스도인을 잘 이해하고 있는 미국 목회자. 100년 전 한국에 복음이 전래되던 초기 성도들은 오직 성경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만을 믿었으며, 지금도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그 믿음으로 어려운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고 전하는 에릭 폴리 목사(한국 순교자의소리). 위기를 맞은 한국교회가 다시 그 성경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하는 폴리 목사를 만났다. 통역은 아내되는 현숙 폴리 순교자의소리 대표가 맡았다.
–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목사님은 한국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실한 믿음을 강조하며 오늘 한국의 성도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한국교회에 던져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한국에 대한 이해함을 갖게 됐는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북한 선교의 최일선에 서게 되셨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먼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셨기 때문에 그저 따라다녔을 뿐입니다. 종교는 제게 철학 같은 것이었지 믿고 싶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무신론자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셨고, 어머니는 간호사로 두 분 모두 의료인이셨어요. 아버지는 어려운 책들을 많이 읽으시고 제게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10대 때, 몰몬교회에 초대를 받았어요. 저는 모든 종교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그곳에서 제게 몰몬 경전을 주면서, 이것을 읽으면 하나님이 따듯한 느낌을 줄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터무니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몰몬교는 엉터리고 말이 안 되는 종교란 생각이 들면서 반드시 진실된 종교는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곳에서 나와 다음으로 간 곳이 감리교회였어요.”
진실된 종교를 찾은 조숙한 청소년
–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셨나요?
“그건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교회에서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기억에 하나 남는 건 성만찬이었어요. 제게 빵을 건네주면서, 이것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상징이라고 하는데, 제게 와닿지 않았어요. 당시에 저는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부모님에게 들은 것 정도뿐이었어요.”
그렇게 진리를 찾던 에릭은 청소년 때 이미 컴퓨터 회사를 운영하며, 다재다능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저는 10대 때, 형과 컴퓨터 회사를 했어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또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컴퓨터를 가르치기도 했어요. 동시에 라디오 디제이도 했어요. 그리고 성적은 늘 ‘A’만 받는 모범생이었어요. 보기에는 다 잘해보였을 거예요. 그러나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는 남들이 보기에는 유능했지만, 내면은 혼돈된 상태였다고 자신의 청소년기를 회상했다.
“돌아보면 주님의 인도하심이 놀라워요. 라디오에서 모닝쇼를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어요. 하루는 뉴스를 담당했던 사람이 주일에 교회에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따라갔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요. 도착한 곳은 감리교회였어요. 빌 로저스라는 담임 목사님을 만났어요.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마자 ‘진짜 잃어버린 양이 왔다’고 말씀하셨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가 사업도 잘하고, 라디오를 진행하는 유명인이고, 성공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목사님은 제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어요. 목사님은 또 제가 잃은 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사실도 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제게 한 가지 미션을 맡기셨어요. 주일마다 아이들을 위해서 설교를 하라는 것이었어요. 제가 라디오 진행도 잘하고 창조적인 사람이어서 아이들에게 설교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목사님에게 설교할 내용들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때 기본적인 진리들을 가르쳐주셨어요. 저는 그때 창세기가 뭔지, 예수님이 뭔지, 부활이 뭔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목사님이 제가 자존심이 너무 세니까 이런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야지 저를 가르칠 수 있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성경을 배우며 성경을 가르치다
– 빌 목사님의 안목이 탁월하시네요.
“그러던 어느 날, 감리교단에서 매년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석했어요. 2000명이 모인 집회에서 빌 퀵이라는 분이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목사의 부르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당시 저는 목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움직이면서 강대상 앞으로 걸어 나갔어요. 앞에 나가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생각을 했어요. 10여 명의 목사님이 안수를 해주려고 서 있는데, 앞에 나온 사람은 저 하나였죠. 목사님들에게 안수 기도를 받고는 목사가 되기로 했어요.”
– 은혜라고밖에는 달리 설명이 안되는군요.
“이후 조금씩 기독교에 대해 배워갔어요. 맞아요. 주님을 알게 된 모든 이야기는 주님의 은혜에요. 제가 하려고 한 게 하나도 없어요. 내가 어떤 좋은 결정을 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강력하게 움직이신 것이죠. 하나님이 빌 목사님이나 퀵 목사님 같은 사람을 보내서 신앙을 자라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항상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에 마음을 열고 있었어요.”
– 이후의 시간이 더 궁금해지네요.
“몇 년 후, 텍사스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여했어요. 당시에는 비행기를 몇 번 타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비행기 타는 재미를 기대하며 갔어요. 5000명이 참석하는 큰 대회였고 굉장히 유명한 목사님들이 말씀을 전했어요. 둘째 날 매우 유명한 분이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저에게 일어나라고 하더군요.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서 복음의 새로운 일(new work of evangelism)을 할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5일 동안의 대회 기간에 제가 무슨 떠오르는 샛별인 줄 알고 사람들이 와서 인사하고 악수하고 연락처도 주고 받았어요. 마지막 날 또 유명한 분이 와서 설교를 하다가 또 저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더니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복음의 새로운 일을 하실 거라고 말을 했어요.”
– 동일한 장소에서 두 번이나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놀랍네요.
“집으로 돌아와 이 일을 보물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목사님이 인디애나에 있는 한 교회로 저를 보내셨어요. 거의 문을 닫기 직전의 교회였어요. 저에게는 교회를 섬기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교회에 도착해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 물어봤어요. 하나님이 우리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후 이 교회가 지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가 됐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전략이 뭐냐고 묻더군요. 다른 건 없었어요. 빌 목사님에게서 배웠던 기본에 충실했을 뿐이었어요. 복음이 뭔지, 신앙이 뭔지를 설교했어요.”
–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디모데전서 말씀이 생각나네요. 역시 복음이면 충분하죠.
“이후 감리교단에서 구성한 특별 위원회에 선정되었어요. 유명한 목사님들만 선정되는 위원회였어요. 회의 첫째 날 모임에 참석했는데, 마지막 회의 때 나와야 할 보고서를 벌써 만들어서 위원들에게 나눠주더군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는데, 이렇게 모여서 그냥 도장만 찍으면 된다고 하더군요. 겉보기에는 굉장하고 멋있어 보였는데 매우 실망했어요. 나중에 지역 책임자에게 연락해서 그 모임에서 빠지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이 그룹에 있으면 그 교단에서 미래가 보장된다며 그냥 있으라고 하더군요. 그때 많이 울었어요.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슬펐어요.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고 사임을 한 후 교단을 떠났어요. 그리고 교회를 비판하지 않기로도 결단했어요. 그래도 교회가 있기 때문에 제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후 두 가지를 결심했어요. 하나는 교회나 교단의 성장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제가 경험했던 것처럼 복음이 기본이 될 수 있도록 헌신을 하겠다는 것이죠. 나 같은 사람을 더 만들겠다는 거예요.”
–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결단을 하셨군요.
“사실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때문에 길어졌는데, 제게 언제 기독교인이 됐냐고 묻는다면, 이 결정을 한 날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 전에는 그저 교회 사람이었어요. 교단을 떠났지만 교회와 함께 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정하고 이후 빌 목사님이 안수 받았던 군소 교단에서 안수를 받았어요.”
– 그러면 다음 질문입니다. 순교자의소리(VOM)를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아내는 나를 좋아했지만 한국인이 아닌 사람과의 결혼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나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한국 사람이기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행동으로 보여줬죠. 아내를 만난 날부터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읽었어요. 한국 음식만 먹기 시작했고, 한국 음식이 맛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 어떤 것도 희생 같지 않았고, 배우는 게 훨씬 많았어요. 그러다 한국 기독교인 역사와 초기 기독교인들의 설교를 보게 됐고 매우 감동을 받았어요. 그런데 한국인인 아내가 미국에 있는 게 마치 나무가 다른 땅에 잘못 심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내가 똑똑하고 열정도 넘치는데 이곳에서는 소수민족이다 보니 사람들이 그런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 현숙 폴리 대표님도 같은 생각이셨나요?
현숙 폴리(이하 현숙): “목사님은 본인 사역보다 제 사역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전 목사님하고 결혼해서 내조를 잘해줘야 된다는 생각만 했어요. 결혼 전에 남편 집에 갔는데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이 얼음만 있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남편에게 보낸 것은 이 사람의 육체적 건강과 중보기도로 보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패션 사업을 하면서 살림을 전혀 안 해봤기 때문에 결혼 이후에는 영상을 보면서 음식을 계속 배웠어요. 그런데도 목사님은 제가 잘못 심겨져 있다면서 한국으로 저를 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저는 쓸데없는 소리라고 딱 잘라 말했죠. 어느 날 LA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여했는데 예언을 하는 분이 저에게 대단한 사역을 할 거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나 전 그때도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해서 새벽에 중보기도센터에 가서 기도만 했을 뿐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 두 분 모두 콘퍼런스를 통해 말씀을 들으셨군요.
현숙: “목사님과 결혼하고 나서 목사 사모가 되니까 사람들이 와서 상담을 요청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 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죠.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대학원 들어가 상담을 배웠어요. 그리고 여러 과정을 거쳐 한국 순교자의소리 대표가 됐는데, 제가 또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공부를 하게 해줘서 리더십 박사학위를 받게 됐고, 또 신학교에 가서 목사 안수도 받게 됐죠. 저는 이 분하고 결혼하고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려고 학교를 가서 공부한 거였는데, 어쩌다보니 여러 학위들을 받게 됐어요.
<이상 261호에 게재>
– 이러한 과정이 대단한 사역을 할 준비과정이었을까요?
현숙: “당시 목사님이 하는 일마다 성공적이었어요. 1300개 단체를 컨설팅해주고 있었어요. 당시 한국에서 노숙자들을 돕기 위해서 목사님에게 와서 NGO에 대해 배우기도 했죠. 그때 목사님이 컨설팅 한 곳 중 하나가 미국의 순교자의소리였어요. 그때 목사님이 성경을 핍박받는 기독교인들 개개인에게 전해줄 수 있도록 하나씩 포장해서 각 나라로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순교자의소리가 사용하고 싶다고 찾아 왔어요. 3명이 회의를 하러 왔는데, 저를 보더니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너무 좋아하시면서 저에게 북한 사역을 해야 된다고 하셨어요. 그동안 15년 이상 한국의 단체(모퉁이돌 선교회)를 통해 북한 사역을 진행했는데, 그곳에서 받은 자료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 답답한 마음이 있었던듯 했어요.”
– 그런 과정을 거쳐 북한 사역으로 연결되신 거군요? 하나씩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네요.
현숙: “사실 결혼하고 2개월이 지난 후에 에릭 목사님이 꿈을 꾼 게 있었어요. 꿈이 매우 현실 같아서 목사님은 꿈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꿈 내용은 우리 둘 다 가진 걸 모두 버리고 헌신해서 북한 지하교인을 섬긴다는 것이었어요. 당시 저는 북한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미국 사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이 제게 심각하게 꿈 이야기를 하는 데 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이 원하시면 자연스럽게 그 길로 가게 되니 그 꿈은 잊어버리라고 했죠. 그런데 결국 순교자의소리 리더들에게 북한 사역을 해야 된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죠.”
북한 선교 사역으로 초대 받다
– 이미 꿈으로도 말씀해주셨던 거네요.
에릭 폴리(이하 에릭): “저는 그 때 꿈이 실현됐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 북한 사역이 아내가 제대로 사역을 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남편으로서 아내가 제대로 된 곳에서 사역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로 20년 동안 하나님이 문을 계속 열어주셔서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 한국 순교자의소리는 언제부터 사역을 시작하셨나요?
현숙: “저희가 2000년도에 결혼을 하고 그때부터 순교자의소리의 사역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미국 순교자의소리에서 북한사역을 했어요. 2000년 중반이 되면서 북한 사람들이 한국에 엄청 많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에릭 목사님은 탈북민 사역도 해야 북한 지하교회와 연결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나 미국 순교자의소리는 원래 지하교회 사역만 하기 때문에 자금지원이 어렵다고 했어요. 그래서 다른 나라의 순교자의소리의 지원(전 세계 15개 국가에 순교자의소리가 설립됨)을 받아서 2007년에 한국 순교자의소리라는 이름으로 단체를 등록하고 한국 순교자의소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1년에 5~6차례 한국에 와서 사역을 하고 대부분은 제가 살고 있었던 미국에서 전화와 영상회의로 한국 사무실을 담당했는데, 한계가 있었어요. 결국 아이들이 다 성장한 후, 2013년도에 제가 먼저 한국으로 왔고, 에릭 목사님은 2015년에 한국으로 오게 됐어요.”
– 2017년에 정릉 고가 아래서 한국 초기 교회 순교자들이 전했던 말씀에 대해 설교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어떤 사역이었나요?
에릭: “한국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그 해결 방안을 한국 초기교회의 순교자들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전했어요. 정릉 고가도로 밑은 한국 초기 기독교인 교사인 김교신 선생이 매일 아침 한국을 위해 부르짖은 장소에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김교신 선생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서 아는 정도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요. 그는 교단을 싫어하거나 무교회주의자도 아니에요. 왜 오늘날 김교신 선생이 중요하냐면, 교회 건물 없이도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불행히도 기독교인들이 교회 건물이나 교단 같은 것들이 없으면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김교신 선생은 교회 건물도 없었지만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방법을 알았어요. 그는 출판사 없이도 성서조선을 냈고, 학교 선생님인데도 예수의 증인으로 살았어요.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스킬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 그렇군요. 지금 한국 성도들도 깨닫지 못한 것을 찾아내셨군요.
현숙: “김교신, 안창호, 주기철 등은 한국 사람한테는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에릭 목사님에게는 살아서 역사하는 초기 기독교인이에요.”
에릭: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에서 유명해요. 그러나 박물관에 있는 주기철 목사만 알지, 그분의 설교를 들어본 한국인은 거의 없어요. 그의 설교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 한국교회를 보면서 든 생각이에요. 그래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위험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 초기 기독교인들의 설교를 잃어버리고 땅에 묻어놨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가 한 일만 기억해요. 그러나 사실은 그 믿음을 배워야 되는 것이죠. 초기 기독교인들의 설교 얻으려고 많이 다녔는데 없었어요. 박물관에는 물건과 사진뿐이었어요.”
초기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지혜를 잃어버린 한국교회
–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왜 ‘지하교회’를 주제로 책을 쓰셨는지 조금 짐작이 됩니다.
(에릭 폴리 목사는 ‘지하교회를 준비하라’, ‘지하교회를 심으라’, ‘지하교회로 살라’라는 세 권의 책을 집필했다. 이중 ‘지하교회를 준비하라’는 순교자의소리 설립자인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의 글을 중심으로 개괄적 소론을 에릭 목사가 집필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난의 시대를 대비하도록 돕고자 출간된 책이다.)
에릭: “(지하교회 시리즈를 출간하고 설교하자)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미쳤다고 했어요. 유럽과 미국의 교회는 이미 동성애 문제로 도전을 받고 실패를 했어요. 법원에 가서 싸우고, 시위하는 것으로 대응하다 지게 된 것인데, 한국에 와보니까 한국도 동성애 문제에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을 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이야기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쓰게 됐어요. 책에 보면 언제 우리가 지하로 내려가야 되는지, 정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나와 있어요.”
현숙: “그러나 어떤 부류는 이런 목사님의 설교를 싫어해요. 동성애를 반대하는 여러 그룹들에게 특수한 자신의 직업으로 이런 일을 돕는다고 하지 말고 먼저 평범하고 좋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설교가 끝나고 얼굴색이 변해요. 목사님도 같이 시위에 나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요.”
에릭: “그러나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죄하는 게 아니거든요. 마치 백신과 같은 거예요. 물론 말씀을 듣고 힘들 수 있지만, 나중에 하나님이 왜 그들에게 경고하지 않았냐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숙: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서 설교를 할 때 듣는 사람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세요. 그 생각은 중요한 경험을 통해 갖게 됐어요.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 처음으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어요. 담임 목사님이 자신을 믿어준다는 생각에 매우 좋아하고 설교를 준비했어요. 알고 보니 그날이 공휴일이어서 사람들이 대체로 교회에 많이 나오지 않는 날이었어요. 희망을 품고 설교를 하러 갔는데 아예 한 명도 안 온 거예요. 그 순간에 목사님이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거라는 마음으로 설교를 했다고 해요. 그때 오직 하나님 한 분 앞에서 하는 설교를 배우셨다고 해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를 하게 된 동기이죠.”
– 한국 순교자의소리의 선교 방식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구출해내는 것보다 그 현장에서 신실한 증인으로 살도록 지원하는 사역이지요. 북한 선교 방식도 역시 그런가요?
에릭: “(저의 스승이신) 빌 목사님이 저에게 하신 것과 똑같아요. 우리가 특별하게 하는 건 없어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조선시대에 성경이 왔을 때로 돌아가는 거예요. 중국에서 북한 지하교인을 만났는데 조선 초기의 기독교인과 똑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북한 지하교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설교를 들으면 그 말씀에 동의하면서 금방 이해를 해요. 북한 지하교인들은 오직 성경 하나로 기독교인이 돼요. 그러나 지금 한국의 기독교인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많이 변했어요. 성경 하나만 믿지를 않고 다른 많은 것들에 의지하고 있어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경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오늘날 북한 지하교인도 그걸 경험하고 있죠. 그러나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 경험을 못하는 것 같아요.”
오직 성경 하나로 그리스도를 경험한 북한 성도
한국 순교자의소리는 2005년부터 풍선을 통해 북한에 성경보내기 사역을 해왔다. 그러나 2019년 말 경기도가 도내 지역에서 풍선 날리기를 전면 금지조치 했다. 이어 2020년에는 정부가 한국 순교자의소리를 조사하고 외국 국적인 에릭 폴리 목사의 강제추방까지 주장하는 등 큰 곤욕을 치렀다.
– 북한에 풍선으로 성경을 보내는 사역을 하시다가 어려움을 겪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에릭: “검찰에서 2가지는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가 없어지고 아직 한 가지 이유로 기소유예 상태에 있어요. 경찰은 계속 우리를 주시하고 있고 불러서 조사하고 있어요. 풍선 사역 때문에 벌을 받지도 않았고, 재정상태도 투명해서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여러 불편한 일들을 겪고 있어요. 우리는 최악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풍선사역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은 멈추시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라고 한 것을 신실하게 하면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죠. 그렇게 기도하고 준비하다 보면 작은 문들이 열리고, 그 기회를 붙잡아 작은 문을 열고 어려워도 들어가면 계속 갈 수 있게 돼죠. 그러면서 오히려 사역이 더 확장된 듯 해요. 힘들고 어려워도 찾아서 들어가면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어요.”
현숙: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던 지난 2년 동안 순종하면서 사역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하나님은 코로나 팬데믹이나 정부에 영향을 받지 않으세요. 하나님 수준에서 움직이신다는 거예요. 아무리 무섭고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어요.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면서, 탈북민 학생들을 한꺼번에 가르칠 수가 없어서 한번에 4명씩으로 나눴어요. 1번 가르칠 것이 10번이 됐죠. 그러다 보니 우리 사역자들로는 역부족이어서 탈북한지 오래된 학생들을 선생님으로 세웠어요. 결과적으로 수업이 더 잘됐어요. 우리 학생들이 더 빨리 많이 배우고 많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현숙: “도시에 있는 탈북민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 시골에 있는 탈북민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훈련된 탈북민들이 다른 탈북민들을 찾아가는 사역을 시작했어요. 유유지하선교학교(순교자의소리에서 운영하는 탈북민학교)의 학생들이 캠핑카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다른 탈북민들에게 찾아가 북한음식도 해주고 복음도 전했어요. 예수님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생겼어요. 폴리 목사님이 시골에 ‘잃어버린 양 한 명’을 찾으라고 지시했어요. 이것을 통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새로운 탈북민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많은 탈북민 학생들이 이런 현장의 훈련을 받으면서 빨리 성장하고 있어요. 또한 사역이 확장되면서 또 한 대의 캠핑카를 사게 됐어요.”
한국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전도 부인’ 같은 전도자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안방 마님들을 전도했다. 캠핑카 사역은 바로 ‘전도 부인’처럼 복음을 들어야 할 탈북민들을 훈련된 탈북민들이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다. 한국에 있는 탈북민 목회자들도 통일을 위해 북한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보다는 예루살렘부터 전하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처럼, 한국에 있는 탈북민들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탈북민 교회를 하는 것보다 탈북민 한 명 한 명을 교회로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정말 하나님이 여시는 길에 순종하시면서 영광을 보고 계시는군요.
에릭: “우리의 사역 방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성경으로 답을 해주는 거예요. 이것이 최초의 한국어 성경을 만든 존 로스 선교사의 방식이었어요. 중국에서 1882년에 누가복음을 시작으로 성경번역을 통해 한국인에게 성경을 안겨준 존 로스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사람들이 물어보는 것을 잘 들은 다음에 성경으로 답을 해줬어요. 이것들은 어떤 프로젝트로 진행한 게 아니었고, 하나님이 열어주신 작은 문을 찾아서 한 것이었어요. 움직일 때마다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고 작은 문이 열리면 들어가고 또 들어가다 보니 이것들이 우리의 사역이 됐어요.”
– 끝으로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제가 처음으로 만났던 북한 지하교인과 기도제목이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대하여 신실하기를 원합니다.” [복음기도신문]
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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