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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칼럼] 만남, 기도, 추억

사진: Aaron Burden on unsplash

공군 목사 이야기(10)

1. 예천교회 목사님에 대한 추억

중국에서 추방된 후에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어느 목사님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그런데 한 분이 나를 반갑게 대하며 고맙다고 했다. 처음 보는 분인 것 같은데 뭐를 고맙다고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뭐가 고마운 것이냐? 고 물었다.

이씨 성의 목사님은 내가 예천 군목으로 있을 때에 자신을 도왔다는 것이다. 당시 60만 원 정도의 돈을 가져와서 “이 돈은 교회의 헌금으로 넣지 말고 목사님 개인용도로 사용하세요.”라고 했단다. “내가요?” 나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니 나는 행하지 않았는데 과거에 내가 그런 일을 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혹시 다른 군목이 한 것을 제가 했다고 착각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했더니 아니란다. 내가 그렇게 했단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한 가지 내가 했음직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만일 내가 어려운 목사님을 도우는 것이라면 교회 헌금으로 넣지 말고 그것을 개인이 사용토록 했을 것이다. 그런 성향의 행동은 내가 맞는 것 같다. 이 목사님과 몇 번을 확인하는 말을 하다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어떤 집사님이 내게 와서 비행단 주변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굶고 있는 목사가 있다니? 나는 그 집사님에게 다시 알아보라고 했다. 그 집사님이 확인 후에 내게 다시 말했다.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힘든 것이 맞는다고 했다. 군인 교인들은 단순하고 순수하다. 그러면서도 일을 맡기면 정확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나는 군인교회와 군인 교인들을 좋아한다. 나는 회계 집사님께 교회에서 구제비로 책정한 것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돈을 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들다고 하는 그 교회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 돈을 드렸다. 나는 그 목사님께 “이 돈은 교회 헌금함에 넣지 마시고 목사님 개인 용도로 쓰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다. 맞다. 그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그 때에 목사님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목사님인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세월이 수십 년이 흘렀으니 기억하기 어려웠다.

후에 더 그 목사님을 알아보니 목사님은 평생 학문을 연구하고 그 학문을 전하는 일에 삶을 드렸다. 그 연구함으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삶을 그렇게 드리고 있었다. 나는 군목을 제대하고서 중국에 가 머리가 하얘지도록 말씀과 학문과 선교에 정진했고 이 목사님은 예천 땅에서 말씀과 학문과 목양을 하셨다. 누가 알아주던 안 알아주던 인기가 있든 없던 그런 것 관여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일을 하며 살았다. 우린 그러고 살았다. 아멘

2. 이광수 목사님

이광수 목사님은 예천비행단 비행 편대장인 곽 집사님의 장인어른이시다. 나는 이분을 군목 동안에는 알지 못했다. 오히려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있으면서 알게 되었다. 이광수 목사님을 추억해본다.

중국 선교사인데 사실 나는 중국에 가본 곳이 별로 없다. 선교지인 랴오닝 성 이외에는 옌지, 하얼빈, 베이징, 상하이, 꾸이린 정도이다. 모두 선교 사역과 행정 때문에 가본 곳이다. 여행은 중국어 공부할 때에 수학여행으로 쑤저우, 항저우에 패키지여행을 했다.

평생을 목회하신 이광수 목사님을 뵌 것은 2007년 정도인가? 베이징에서였다. 평안도 분이신데 한국전쟁 때에 남한으로 와 사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벌은 돈 들여 교회를 지어 주님께 봉헌했다. 당시 교회에서 30년 동안 휴가비로 준 돈을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여행을 간 적이 없고 모두 선교비와 구제비로 사용하셨단다.

내가 목사님을 뵌 그 때 이광수 목사님은 중국 베이징에 처음 여행을 오셨다.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만나서 닮아가는 것인가? 아무래도 내가 이광수 목사님을 존경한다면 그를 닮아갈 것이다. 이광수 목사님과 비슷한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루었듯이 나는 그런 선교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3. 기도로 맺어진 인연(因緣)

군산 비행단 관사에 심방예배를 다녀왔다. 군종병이 국방참모대학 총장실 부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단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국방대학원 총장실 부관이 왜 나한테 전화를? 혹시 중고등학교 동창 혹은 대학 동창 가운데 누가 국방대학원 총장실 부관이 되었나? 그래서 나한테 전화를 했나? 그렇게 생각했다. 또 한 번 전화가 왔는데 그때도 나는 부대의 일 때문에 그 부관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세 번째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목양실에 있었다. 군종병이 오더니 “목사님, 국방참모대학 총장실 부관으로부터 전화입니다. 목사님을 바꿔 달랍니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내가 아는 동창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부관이 하는 소리는 “총장님께서 목사님과 통화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바꿔 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으잉? 총장님? 아니 국방참모대학 총장님이 왜 나하고 통화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에서 테너음의 경상도 발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신다면서요?”

“예, 그렇기는 한데 제가 기도하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아 예, 그 전대 지휘관이 제 후배입니다. ○○이가 우리 교회 목사님이 총장님 위해 기도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계속 기도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1994년 12월 하순에 성탄절을 앞두고 나한테 성탄 카드가 왔다. “국방참모대학 총장 소장 이 ○○ 장로 배상” 거참 감사했다. 육군 장군 장로님이 공군의 목사한테까지 성탄카드를 보내시니 그 정성이 참 감사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새벽기도 때에 생각이 나기에 이 장로님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런데 그 장로님하고 지금 전대의 지휘관 집사님하고 선후배 사이라고? 아니 지금 지휘관 김 집사님은 전라도 분인데? 아까 전화의 그분은 경상도 사람인 것 같고? 그런데 어떻게 선후배사이라는 것이지? 두 분 사이에 연결점이 이상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나는 지휘관이신 김 집사님께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김 집사님이 ‘씩’ 웃으면서 “국방참모대학 총장님은 공군이십니다.” 했다.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보통 ‘국군’이란 단어가 붙으면 다 육군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공군이라니? 그러나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즉시 알아차렸다. ‘국군’ 단어가 붙는 것을 모두 육군 장군들이 맡는 것이 아니고 육해공군 장군들이 나누어서 ‘장’(長) 자리를 맡고 있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그 이후로 국방참모대학 총장님은 내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서울을 올라갔을 때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때도 난 참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데 장로님은 차를 내주셨다. ‘그랜저’였다. 그리고 장로님이 직접 차 문을 열어주셨다. 정말 몸 둘 바를 몰랐다. 이거 뭐 거의 자식뻘인데 단지 목사라는 이유로 그렇게 황송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장로님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한 것을 말할 나위도 없다. 아, 그리고 그때 돌아올 때에 그랜저 좌석이 따뜻해졌다. 세상에 차의 의자가 따뜻해지는 것은 그때 처음 경험해봤다.

장로님은 나를 많이 돌봐주셨다. 그리고 내가 선교를 갔을 때도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셨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성탄 카드를 육군 장로님이 보낸 줄 알고 고마워서 기도한 것을 통해 이렇게 귀한 인연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영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라났다. 그 중 장로님께서 나를 어떻게 도와주셨는지는 나중에 따로 책 한권으로 써야 할 정도이다. 장로님은 가장 잊을 수 없는 분 중의 한분이시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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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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