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탈(脫)쇄국정치, 선교의 문이 열리는 신호탄

▶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왼쪽)과 1876년 조일수호조약을 위해 모인 조선과 일본 관리들. 출처:arabamerica.com, monthly.chosun.com 캡처

위기의 한국 사회. 예레미야는 엎드러지고, 거꾸러질 때, 옛적 길,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고 기록하고 있다(렘 6:16). 이 땅에 허락된 옛적 길, 그 선한 길을 찾아 떠나자. 하나님이 이 민족을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 다시 되짚어 보며 이때 우리가 취할 바를 역사 속에서 발견해 보자. <편집자>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 열풍은 ‘아랍의 봄’으로 불리며, 전 세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외부에 폐쇄적인 아랍 사회가 시민들의 자유화 요구에 개방의 물꼬를 여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이때를 중동 선교의 미래가 열릴 것으로 기대하며 본격적으로 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같은 기대는 예상대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이슬람 선교를 위한 기도가 구체적으로 일어나게 했다.

비슷한 관점에서 140여 년 전인 1876년 3월 강화도에서 체결된 한국과 일본의 조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은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지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국제무역에 관한 협약이면서 국가 간 거래 경험이 없어 관세조항이 빠진 불평등 조약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선교사들의 시선은 남달랐다. 대원군과 유생들의 요구에 따라 ‘쇄국 정책’으로 견고하게 닫혀 있던 조선의 문빗장이 서서히 열리는 전환점으로 인식된 사건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 선교의 문이 열리고, ‘구로후네(黑線) 쇼크’라는 미국 함선의 위력 앞에 문을 열어야 했던 일본에 선교사의 발길이 이른 것처럼, 강화도조약은 조선 선교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나무로 만든 전통적인 배밖에 없던 일본은 ‘쇠’로 만든 검은 미국의 중무장 함선(黑線.흑선)의 등장 이후, 1858년 미일수교조약을 맺고 미국인의 입국을 허용했다. 강화도조약은 이 같은 의미에서 당시 ‘조선 선교가 언제 열릴지 지켜보던’ 동북아 지역 선교사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동북지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주목한 강화도조약

강화도조약의 소식을 중국에서 접한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존 로스의 발걸음은 급해졌다. 이미 알렉산더 윌리암슨 선교사를 통해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1876) 소식을 듣고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로스 선교사. 그는 한국인 만나기를 기대하며 1876년 4월 한중 자유무역지대인 고려문을 2년만에 다시 찾았다. 로스는 그곳에서 의주 상인 이응찬을 만나 본격적인 성경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882년 한국 최초의 쪽복음 성경책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를 발간하게 됐다. ‘예수셩교(聖敎)’는 예수의 거룩한 가르침이란 의미다.

성경번역이 이처럼 그저 한 두 문장의 설명으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져오고 있지만, 당시 인쇄기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 활자 자체가 없던 시절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이뤄졌을까? 수천 권의 성경책 인쇄를 위한 재정은 어떻게 마련됐을까? 생각해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님은 로스가 홀로 이 일을 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동역자를 붙여주셨다. 로스와 함께 조선어 성경번역에 혼신의 열정을 쏟은 맥킨타이어 선교사는 로스의 매부(妹夫)이기도 했다.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를 낳고 소천한 로스의 아내 대신 조카를 돌봐주기 위해 중국으로 찾아온 여동생 캐더린이 맥킨타이어 선교사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됐던 것.

성경번역이 한창이던 1879년 5월 로스는 그때부터 2년간 안식년을 떠난다. 그러나 그에게 그 기간은 스코틀랜드에서 단순히 안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안식년 기간 중 그는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담은 조선 안내서를 집필해 발간하고, 이 책자를 배포하며 조선 선교사역의 동역자를 모았다. 또한 조선어 성경책 인쇄를 위한 후원자도 발굴했다. 안식년을 끝내고 돌아온 로스는 성경을 인쇄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돌아온 로스는 조선어 성경인쇄를 위한 기반시설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책자를 대량으로 인쇄하려면 금속 활자인 납활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는 금속 활자를 만들 기술력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성경번역에 참여했던 서상륜 등과 함께 나무 활자를 만들어 일본에 보냈다. 이를 토대로 주조 기술이 있던 일본 요코하마에서 납활자를 제작, 3만 5000여개의 음절별 한글 활자를 공수 받았다. 그리고 인쇄를 위한 기술진도 필요했다. 2명의 중국인 인쇄공과 매약상(약을 제조해 판매하는 사람)으로 일하던 김청송이 식자공(활자를 배열하고 조판하는 일)으로 참여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로스와 맥킨타이어의 지휘 아래 한국 근대 금속 활자로 한국어 책자를 인쇄하는 기념비적인 역사에 참여한 것이다.

금속 활자로 대량 인쇄의 길을 연 ‘누가복음’

로스에 의한 조선어 성경발간이 중국 심양에서 이뤄졌지만 한국어 활자, 한국인 참여로 이뤄진 근대출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도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 인쇄 기술은 1883년 한성부(요즘의 서울시)의 박문국(출판국)에서 10일 간격으로 발간되는 신문 한성순보로 시작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로스의 한글 성경은 이보다 한 해 빠른 1882년 출간됐다. 이에 따라 선교사 자격으로 처음 입국한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국어 성경을 갖게 된 것은 선교역사에서도 희귀한 일이다.

당시 인쇄 기술은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졌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입국하던 해인 1885년 8월 배재학당을 세우고 이듬해인 1886년에 근대식 활판 인쇄 시설을 갖춘 인쇄소를 개설해 선교와 계몽을 위한 전단지와 책자 발행에 참여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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