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던 자, 기도하는 성전을 꿈꾸다

기도로 그 날을 준비하는 홍희경 권사(아야진 교회)

강원도 고성 바닷가 부근의 조용한 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집, 그 옆에는 또 다른 작은 공간이 있었다. 아야진 교회였다. 자녀들과 어머니와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기도로 그 날을 준비하는 홍희경 권사를 만났다. 환한 미소 속에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의 고통을 거쳐온 듯한 홍 권사의 삶으로 들어가 본다.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으셨어요. 그래서 기독교 문화 안에서 자라기는 했어요. 그렇지만 어릴 때는 믿음이라기보다 재밌고 좋아서 교회에 갔어요. 어릴 때, 우리 가정은 유복하고 화목했어요. 그러다 제가 중학교 때 성폭행을 당하고 그게 발단이 되어 어머니가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셨어요. 어머니는 언어폭력도 심해지면서 거의 약으로 사셨어요. 잘 주무시지도 못하는 엄마를 위해 아버지는 카페를 차려주셨어요. 마음을 다른 데 두게 하려고요. 그러나 엄마는 오히려 밤 늦게 들어오셨어요. 저도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방황을 하게 됐어요.”

폭행당한 피해자에서 방황의 길로

-아직 어린 나이인데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군요.

“중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남과 이태원을 배회하면서 놀았어요. 제가 좋아했던 친오빠가 24살에 사고로 죽은 뒤에는 저도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요. 부모님은 바쁘시고, 제 마음을 알아주는 건 같이 술 마시고 마약하는 친구들밖엔 없었어요. 그래서 더 방황을 하게 됐죠. 자살시도도 여러 번 했는데 그때는 마약 중독 상태여서 기억이 잘 안나요. 그러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됐어요. 어머니는 제가 마음을 잡고 살기를 원하는 마음에 결혼을 시켜주셨는데, 그 남자는 폭력이 너무 심했고 경마 중독이었어요. 돈 떨어지면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하고 결국 도망을 나와 고모가 원장으로 있는 기도원으로 갔어요. 어느 누구도 나를 이끌어줄 사람이 없었는데 고모가 도움이 돼 주셨어요. 그렇게 교회에 나가게 되고 세례를 받으면서 새 인생이 시작됐어요. 그때가 25살이었어요.”

-네, 20대 초반에 많은 어려움들을 경험하셨네요. 새 인생은 어땠어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이 너무 뜨거웠어요. 아이 같은 신앙이었기 때문에 고모가 알려주는 대로 십일조도 드리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교사도 하면서 교회를 섬겼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고성으로 이사를 하셨어요. 어머니도 그동안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셨죠. 제가 어렸을 때는 서울에서, 그것도 100평이 넘는 집에서 살았어요.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고, 결국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마지막 장소가 고성에 있는 구멍가게였어요. 엄마는 매일 술을 드셨는데 그런 엄마를 보면서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고성으로 내려오게 됐어요. 그때가 28살 정도였어요.”

-그렇게 고성에 터를 잡게 되셨군요. 고성에서 생활은 어땠나요?

“엄마는 부대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셨어요. 저는 고모가 미용을 배워보라고 권하셔서 미용을 하게 됐죠. 미용을 해서 봉사하고 선교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엄마의 폭언을 다시 들으면서 힘든 생활이 또 시작됐어요. 제 힘든 마음을 누구한테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어요. 그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됐어요. 힘들 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이후 남편을 사랑하게 되면서 제 사정을 다 이야기하고 그래도 결혼하겠냐고 물었죠. 제 사정 때문에 힘들어했어요. 게다가 시댁과 우리 어머니도 이 결혼을 반대하셨어요. 그렇게 긴 시간 여러 과정을 거치고 나서 남편이 그냥 같이 살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먼저 살림을 꾸려 살다가 첫아이를 낳고 2년 후에 결혼식을 하게 됐어요.”

뜨거운 신앙도 상황 앞에서 무너지고

-네, 이제 안정이 좀 되셨겠네요.

“아니요. 결혼을 하고부터 또 힘든 생활이 시작됐어요. 남편이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제가 잔소리를 하면 살림들을 부쉈어요. 제가 살 수 있는 힘은 오직 교회뿐이었어요. 그래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어요. 혼자 전도하러 다니면서 열매도 많았어요. 그러나 힘든 생활을 못 견디고 다시 술과 담배를 하게 됐어요. 이것 때문에 아이 둘을 임신중독으로 7개월 만에 낳았어요. 아이들이 많이 아팠지만, 교회 성도들이 많이 돌봐줬죠. 그 뒤로 주초문제도 해결되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다가 이후에 신학을 하게 됐어요.”

-어떻게 신학을 하게 되셨죠?

“사실 저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해서 신학교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이전부터 신학 공부에 대한 사모함은 있었죠. 고모네 기도원에서 강대상을 청소하면서 카리스마 있는 여자 전도사님 흉내를 내기도 했어요. 당시 깡패였다가 목사가 된 부흥사들의 간증을 들으며, 나도 주님이 이렇게 쓰실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신학을 공부하고 싶지만 조건이 안돼 포기했죠. 성서신학원은 졸업장이 없어도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던 중 복음학교를 알게 돼 참석하게 됐죠. 그때 예수님과 함께 존재적 죄인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게 됐고, 그때 저처럼 방황하고 있는 다음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 부어졌어요.”

-다음세대를 살리는 일이 정말 중요하죠. 그런데 쉽지 않으셨죠?

“저는 죄의 구렁텅이에서 확실하게 구원받은 자에요. 덕분에 그런 환경에 있는 다음세대를 보면 안타까움이 있어요. 이곳에 와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한 부모 아이들을 많이 만났어요. 주일 아침이 되면 자는 아이들 깨워서 양말 신기고 차에 태워 교회에 데려올 정도로 다음세대를 향한 열정을 갖게됐어요. 아이들이 주님을 만나고 오게 하자는 마음 하나였어요. 중학생 아이들은 그러다가 교회를 안 나오곤 해요. 찾아가면 “선생님, 가면 맥주 줘요?”라고 당돌한 반응을 해요. 그러면 제가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해주곤 했어요. 어린이전도협회에서 사역을 하고 다른 지역에 가서 아이들에게 전도도 했어요. 점심시간에는 학교에 들어가서 전도를 했어요. 사탕 하나 안줬다고 불교를 믿겠다고 하는 애들도 있었어요. 그래도 행복하게 아이들을 섬겼어요.”

-방황하는 다음세대의 마음을 잘 아셔서 은혜가 넘쳤겠네요. 이후엔 어떤 시간들을 보내셨나요?

“제가 복음학교 참석했던 게 신학원 방학 때였어요. 간절한 마음으로 간 건 아니었어요. 우리 아이들에게 한 선교단체의 신앙훈련을 받게 하면서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그런데 복음학교에서 성경을 중심으로 총체적으로 풀어 설명해주니 복음이 처음 들어본 이야기 같았어요. 그리고 은혜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제 인생이었음을 깨닫게 됐어요. 그때는 디스크 때문에 허리가 많이 아파서 오래 앉아있지 못해 서서 강의를 들었어요. 강의를 하나도 놓칠 수가 없어 들리는 모든 말을 노트에 빽빽하게 적었어요. 그러는 동안 주님은 제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그것이 뭔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사모함이 생겼어요. 그래서 선교단체에서 하는 중보기도학교와 선교관학교 훈련을 받았어요.”

복음 만나고 기도 사명의 꿈을 꾸다

-어떻게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지셨나요?

“그때 강릉에 있는 한 개척교회에서 모여 화요일마다 열방을 위해 기도하고, 또 느헤미야52 기도도 했어요. 너무 좋았죠. 그런데 한 두 시간 기도하기 위해 3시간씩 이동해야 했어요. 그러다 고성에 있는 동명교회에서 느헤미야52 기도를 하고 싶다고 해서 이곳에서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게 됐어요. 그렇게 기도한 게 벌써 5년이 됐네요. 느헤미야52 기도는 열방의 여러 상황들을 놓고 한 주 동안 기도하는 프로그램이에요. 해외에 기도 아웃리치를 나갔을 때는 기도에만 전념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곳에서는 직장과 가정, 부모와 자녀의 관계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되니까 쉽지가 않았어요.”

▲ 사랑하는 남편, 자녀들과 함께. 제공: 홍희경 권사

-그 어려운 기도 시간을 어떻게 5년간 이어오셨는지 놀랍네요.

“1년에 한 번 정도는 일주일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하루 종일 돌아가며 기도를 하고 주일에 교회를 섬겼어요. 새벽기도 갔다 와서 7시에 밥을 하고, 아이들 주일학교 차량 운행, 예배, 성가대, 찬양대…. 그때는 교회에 대한 열심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주님은 제 이런 열심을 하나님을 향한 열심, 하나님을 아는 일에 대한 열심으로 바꿔주셨어요. 우리 남편은 하나님을 믿지는 않아도 저와 아이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죠. 그런데 하루는 밤새 느헤미야52 기도를 하고 돌아왔는데 집에 문이 잠겨있는 거예요. 간신히 들어오기는 했는데, 그렇게 반대에 부딪치면서 주님이 저를 다뤄주셨어요.”

-많은 사연들이 있었겠죠.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제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신학원도 가고 교회도 섬긴 게 사실이었지만 100% 하나님을 사랑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더 높임을 받기 원했던 것이었어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어요. 집이 잘되고 아이들도 공부 잘하고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이 잘 믿는 사람, 믿음 좋은 가정의 모습인 줄 알았어요.”

<이상 242호에 게재>

– 주님을 알아가면서 죄인인 우리의 실상을 더욱 실감하게 되셨군요. 주님이 내면에서 많은 일을 하셨군요.

“5년 동안 해오다보니 익숙함으로, 타성에 젖어 하는 때가 많았어요. 그러나 주님은 신실하셔서 주님 수준으로 제게 계속 일을 하셨어요. 느헤미야52 기도 끝날 때까지 지체와의 어려운 관계를 회복하지 못할 때가 있었어요. 기도하는데 주님이 끝까지 신뢰하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그러면서 그 지체가 아니라 바로 내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게 하시고 내가 넘어가지 못하는 한계를 넘게 해주셨어요. 끝까지 주님이 인도해 주셔서 관계도 회복 됐죠.”

– 기도의 시간에 그런 회복이 일어났군요. 또 다른 은혜가 있나요?

“어머니와 느헤미야52 기도를 하는 것도 은혜가 많아요. 어머니가 실제로 죽다 살아나셨거든요. 어머니는 3개월에 한 번씩 입원을 하셨어요. 심근경색, 류마티스, 갑상선, 투석도 하셔야 하고 약도 7~8개 과의 약을 드세요. 한번은 숨이 가쁘다고 하셔서 병원에 갔어요. 중환자실에 계셨는데 갑자기 심장이 멈춰서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의사들이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죠. 호흡을 하지 않은 시간이 좀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다시 호흡이 돌아왔어요. 병원에서는 뇌와 가슴에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고 했어요. 호흡기를 낀 상태로 2~3일 후에 깨어나셨는데, 엄마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찬양을 부르셨어요.”

사망진단을 받은 어머니, 다시 일어나

– 너무 기적 같은 일이네요. 그런 분이 지금 기도를 하신다는 말씀이세요?

“엄마는 눈이 어두워 기도할 때 기도정보를 다 보진 못하세요. 그래도 소파에 누워계시다가도 우리가 기도하면 벌떡 일어나서 ‘아멘’도 하시고, 찬양 가사를 불러드리면 잘 따라하세요. 그리고 기뻐하세요. 한 집사님은 이런 엄마의 모습만 봐도 은혜라고 하시죠.”

– 은혜네요. 기도모임은 어디서 진행하시나요?

“지금은 집 옆에 있는 교회에서 드려요. 교회가 생긴 과정도 은혜에요. 엄마가 아프시면서 집에서 모시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기도할 곳이 없어졌죠. 기도할 공간을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엄마가 사시던 작은 집을 팔았는데 예상보다 많은 금액을 받았어요. 어머니는 그 재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집 옆에 작은 공간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기도처소가 생겼는데, 마침 어머니가 움직이는 게 어려워지면서 자연스럽게 기도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고, 동명교회에서 우리를 파송해 아야진 교회를 세우게 됐어요.”

– 그렇게 개척을 하게 되셨군요? 이제는 어려운 시간들이 지나고 행복한 시간만 남은 것 같네요.

“네. 그러나 지나온 과정들이 만만치는 않았어요. 엄마를 받아들이기까지도 가슴 아픈 일이 많아요. 어머니는 혼자 사시면서 계속 술을 드셨어요. 밤에 전화를 받고 집에 가면 술을 드시고 떨고 계셨어요. 그러면 죽을 끓여드리면 맛나다고 하시면서 드시다가도 또 저를 힘들게 하셨어요. 엄마를 모셔야 되는 상황이 됐을 때는 어려웠어요. 복음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제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보게 됐어요. 엄마를 모시게 되면서 제가 엄마에게 욕도 하는 거예요. 전 제가 착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하루는 힘들어서 집을 나갔어요. 그런데 갈 데가 있어야죠. 다시 저녁때 들어왔어요.”

– 계속 믿음을 붙들어야하는 시간들이었군요.

“그런데 어머니가 저런 상태로 복음학교에 참석하셨어요. 어머니는 그 당시만 해도 잠을 아무데서나 못 주무셨어요. 엄마가 우리 집 옆에 사시면서 자식 집에서 밥 한끼 드신 적이 없을 정도로 깐깐하셨는데, 잘 적응하시더군요. 그러나 복음학교에서 엄마를 섬기면서 많이 부닥쳤어요. 어떻게든 엄마에게 복음을 듣게 하려고 제가 싫은 소리를 계속 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주님은 엄마가 예수생명이 됐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러자 엄마가 마음에 품어졌어요. 그리고 주님은 엄마를 순한 양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게 해주셨어요. 병원 중환자실에 있을 때, 다 잊어버려도 예수님은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엄마는 정말 그렇게 하셨어요.”

엄마의 변화, 중환자실에서도 예수님을 기억하고

– 위중한 상태에서도 예수님을 기억하셨다니, 은혜네요.

▲ 어머니와 함께. 제공: 홍희경 권사

“주님이 엄마를 붙들고 계신 것을 봐요. 왜 엄마를 아직까지 살게 하실까 생각해봤는데 저 때문인 것 같아요. 엄마를 보면서 작은 자를 섬기는 게 예수님을 섬기는 거라는 마음을 주세요. 엄마를 통해 그것을 하게 하시려는 구나 생각해요. 그러나 엄마는 예전보다 많이 바뀌셨는데도, 어려운 게 있어요. 제가 얼마나 악한지요. 그러나 지금도 삶의 구석구석에서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엄마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 마지막으로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아야진 교회로 부르셨을 때 광야의 외치는 자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이 땅에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예비하는 자로 서서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주님을 믿지 않아서 때로는 핍박을 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주님만 바라볼 수 있었어요. 남편도 그 주님을 함께 바라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세요.”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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