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권적인 은혜의 복음 (7)
오랫동안 아버지 말에 종처럼 순종한 자신을 위해서 잔치 한 번 벌인 적 없다고 분노를 쏟아 붓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
이 큰 집안에 그동안 잔치가 없었겠는가? ‘이 집안의 모든 것이 너에게 넘어가는 유산이니 내 이름으로 한 잔치가 다 네 것이고, 지금까지 모든 게 다 너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큰아들이 싫다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왕이 되는 잔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아예 명의도, 등기도 내 것으로 확실히 옮겨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살 만큼 사셨으니 좀 사라져주시고 내가 실제 주인 노릇 좀 하자는 말이다. 늘 아버지를 섬겨 여러 해 동안 그 명령을 어김이 없었다는 말 속에는 단 한 번도 큰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해서 순종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 담겨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반응을 통해 두 탕자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드러난 탕자요, 하나는 위장된 탕자이다. 아담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형상을 지어놓으셨는데 하나는 집 안에 있는 탕자요, 하나는 집 나간 탕자다. 그 차이밖에 없는 것이다.
집 안에 있다가 드러난 탕자는 평소 겉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그는 차마 집을 뛰쳐나가진 못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은혜도, 감격도, 자발성도 없었다. 집 나갔던 동생을 위한 잔치를 통해 비로소 그의 분노와 치명적인 악독함, ‘충만한 자기 의’가 드러났다.
이러한 자기 의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조 원의 빚에 달하는 일만 달란트를 왕에게서 탕감 받은 자가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100만 원을 빚진 동료를 만난 순간, 그의 멱살을 사정없이 붙잡아다가 결국 감옥에 처넣는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 앞에 부을 때, 얼마 후 돈에 미쳐 예수님을 팔아넘길 뻔뻔한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주었더라면 좋았겠다며 마리아를 비난한다. 악독하고 잔혹한 죄인의 자기 의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듣는 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다. 밥벌이를 위해서라도 율법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 없기에 싫든 좋든 율법을 지켰다. 그러면서 나는 저 인간이나 탕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남이 보는 앞에서 예배드리고 율법을 지키고 욕 한마디 안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지만 그 말씀이 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눈곱 만큼도 닿은 적이 없다. 하나님을 이용할 뿐,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순종하여 생명을 드린 적은 한 번도 없는 자가 바로 집안의 탕자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진짜 위기는 감춰진 속병이다. 겉에 상처가 나면 어쨌든 치료를 시작할 수 있지만 간암이나 혈액암 등은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진짜 위기인 것이다. 육체로도 그런데 하물며 우리 마음 중심, 영혼에 병이 생긴다면 그건 진짜 위기다. 위기 중에 위기는 마음이 떠나 영적 간음을 하고 마음을 팔아먹는 위기이다. (2018년 4월)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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