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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근본주의(3): 근본주의의 쇠퇴

사진: Simon Berger on Unsplash

우리는 근본주의 운동의 선구자들에게 엄청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슬프게도, 지난 세기에 그들이 싸운 전쟁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다. 그들이 대담하게 나서지 않았더라면, 대다수의 미국 교회가 종교 개혁의 심장부였던 유럽을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든, 비대한 힘을 가진 신학적 자유주의의 영향에 항복했을 것이다.

원래의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적 교리가 가볍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귀중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미국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유일성, 부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저주의 현실, 인간 타락과 같은 근본적인 기독교 진리를 단호하게 변호했다. 이 초대의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진리에 대해 협상을 거부함으로 승리했다. 이것이 자유주의가 미국 교회의 경관을 결코 뒤엎지 못하는 이유이며, 성경을 최고로 여기며 복음을 충실하게 전파하는 교회들을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근본주의 운동은 초기에 성공을 거두자마자 거의 동시에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학문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한 무리의 근본주의자들은 시대의 흐름이었던 다원주의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 신학적 자유주의에 맞서 설립된 학교들은 자유주의 신학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초기의 근본주의의 강력한 입장(성경의 무오류)을 포기하면서 성경의 무오류에 관해 타협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일부 근본주의 학교와 교회들은 창립한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포기해 버렸다! 이들 기관들과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신속하게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을 부인하고 버렸다.

근본주의의 또 다른 한 무리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집착했던 그들의 동료들이 근본주의의 기본을 포기해 버렸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학문을 불신하거나 혹은 학문을 완전히 버려 버렸다. 이러한 근본주의 운동의 우파들은 싸우기를 좋아하는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분열되었다. 이들 중 율법주의자들은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만 극도로 강조했다. 때때로 사소한 문제들이 토론과 논의가 주된 문제가 되어 중대한 교리를 대체했다. 이 무리들은 신자들의 실제적인 근본을 지키기 위해 들이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사람들의 머리 길이와 여성의 복장 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토론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쓸데없는 말싸움을 좋아하는 모든 극단적인 율법주의자들은 마침내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손상시키고 말았다. 지능적으로나 기질상에서, 이 무리의 근본주의자들은 근본주의 운동의 아버지들이 그렇게 강력하게 지켰던 높은 신념을 완전히 버려 버렸다. 그러한 결과로 근본주의 운동은 교리를 교묘하게 경시하는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 무리의 근본주의자들에게서 출판된 자료들 중에 진정한 교리적 깊이나 성경적 깊이를 지닌 중요한 저작물이 전혀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는 이 호전적인 무리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최근 몇 년 동안,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는 세속적인 언론에 의해 오용되었고 언론들은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종교적 광신자들에게 이 이름을 붙였다.

문을 넓히다

초기 근본주의의 논리적이고 신학적이던 정신은 모두 죽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너무나 기꺼이 교리를 과소평가한다. 근본주의적 선배들과 달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참된 기독교가 폭넓게 다른 – 심지어 모순 된 – 신앙 체계까지 수용할 만큼 충분히 넓어야 한다는 제안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적인 교리상의 차이에 관계없이 가톨릭, 동방 정교회, 극단적 은사주의자들, 심지어 자유주의자들을 자신들과 동일하게 생각하며 그들과의 영적 동맹을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을 거부했다. 에큐메니즘의 주된 힘은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였는데, 성경적인 기독교를 전혀 상관하지 않았던 이 단체는 주로 초 자유주의적 교단들 중에서 회원을 모집하는 것을 선호했다. 결과적으로 에큐메니즘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조금 혹은 아예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번창한 시대였던 1960년대에도 복음주의 교회는 극적인 성장을 경험했으며 에큐메니컬 교회는 빠르게 쇠퇴하였다. 십 년 전에는 세계 교회 협의회는 잃어버린 운동의 유적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 그림이 바뀌고 있다. 놀랍게도, 오늘날 가장 강력한 에큐메니컬 세력은 가라앉고 있는 복음주의의 기치 아래에서 은사주의 운동, 가톨릭과 복음주의의 일치, 협동적인 대중 전도, 그리고 기독교 언론계의 목소리들과 함께 하고 있다.

높이를 낮추다

주요 복음주의 특성인 “근본”을 박탈하려는 공격적인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복음주의의 영향력 있는 목소리들은 우리에게 근본들을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믿음의 진술(the Statement of Faith)”로 줄이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소리들은 전반적인 복음주의 안에서 들을 수 있다. 더 넓은 관용과 더 포괄주의적인 것들을 호소하는 것은 은사주의자들, 세대주의자들,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들, 개혁주의자들과 루터교의 지도자들, 즉 거의 모든 종류의 복음주의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2013년 죽기 전까지) 트리니티 방송 네트워크의 회장이었던 폴 크라우치(Paul Crouch)를 예를 들자면, 그는 “제가 자주 말했듯이, 어떠한 신학자가 이단이라고 여기는 것이 다른 신학자에게는 정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크라우치는 우리가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는 유다서 3절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크라우치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중 한 목소리로 사도신경이 “믿음”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과연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의 가장 확실하고 협상할 수 없는 근본들을 제공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사도신경이 얼마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권위가 있다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가? 다음 시간에 이 점을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카메론 부텔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관련기사]
[GTK 칼럼] 근본주의(1): 근본주의는 혐오스런 단어인가?
[GTK 칼럼] 근본주의(2): 근본주의의 등장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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