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고통이 될 때까지 구하는 것”

[225호 / 나는 기도하리라 (3)]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삼상 2:10~11) 원래 한나는 기도하던 여자였다. 기도 밖에는 할 줄 몰랐다. 기도 없이는 못 사는 여인이었다. 즐거울 때도 기도했을 한나가 지금 간절히 기도하고, 통곡하고, 서원하고 있다. 왜?

‘기도의 여인’이 기도하는데 응답이 안 된다. 육적인 여자, 대적 브닌나가 기도하는 영의 여인 한나를 조롱하고 공격한다.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영의 사람에게 이 말처럼 듣기 힘든 조롱의 말은 없다. 한나는 자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날 잊으셨나. 하나님이 내 말을 듣지 않으시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게 부끄러운 것이 있나.’ 그렇지만 한나가 의지할 곳은 주님 밖에 없었다.

‘믿음으로 사는 건 좋지만, 복음은 너무 놀랍지만 진짜 어렵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너무 힘들다.’며 신앙생활 하다가 마음이 괴로워서 포기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복음으로 한번 제대로 목회 좀 해보겠다고 결심했다가 너무 어려워서 어느새 그냥 원위치로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

그러나 한나는 달랐다. 마음이 괴로웠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갔다. 기도하고 기도했다. 문제가 풀리기는커녕 더 괴로웠다. 괴로워서 통곡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기도가 고통이 될 때까지’ 기도했다. 고통이 오면 더욱 기도했다. 고통이 더할수록 더 기도했다. 대단한 용기나 의지를 가졌기 때문일까?

젖먹이 아이는 엄마 품 떠나면 죽는 줄 안다. 그 아이는 밤새 울 능력이 있다. 의지 때문에 우는 게 아니다. 대단한 각오와 결심이 있어서도 아니다. 엄마 떨어지면 죽으니까, 엄마 없으면 못 사니까 우는 것이다. 누가 끝까지 매달리는 줄 아는가? 대단히 잘나고, 의지 충만하고, 똑똑하고, 신학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사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너무너무 약해서, 너무너무 두려워서 하나님 떠나면 죽는 줄 알고, 하나님 손길 놓치면 못 사는 사람들이 끝까지 복음 편에 서서, 기도의 그 자리에 남아서 매달린다.

기도의 삼중적(三重的) 약속이라고 알려져 있는 황금 구절이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이 말씀은 ‘기도하라, 더욱 기도하라, 끝까지 기도하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일러스트=노주나

한나는 기도가 ‘운명’이 된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연약한 여인 한나의 태를 ‘일부러’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서 매달린 딸에게 잔인할 정도로 아이를 안 주셨다. 시련의 폭풍이 더 거세게 몰아쳐도 안 주셨다. 기도가 통곡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안 주셨다. 그런데도 한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2018년 1월)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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