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 즉 나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는 새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에 제대로 부딪쳐졌다면 그 복음의 결과인 ‘변화’를 반드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변화를 크게 오해합니다. 만족스런 상황과 조건 속에 있게 된 외적인 변모를 변화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을 변화라고 여길 경우, 진정한 복음의 영광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간단하게 증명됩니다. 만약, 내가 바라는 상황과 조건이 주어졌다고 그것이 영원할까요? 우리는 나를 불행하게 하는 원인을 ‘부모를 잘못 만났다.’, ‘결혼을 잘못했다.’와 같은 상황과 조건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소원이 성취되고 문제가 해결된 사람의 간증을 많은 이들이 주목합니다. 그러나 상황과 조건이 완전히 바뀌어도, 그 마음 중심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사람의 내면의 변화는 없습니다. 몸은 교회에 다니며 집사, 장로, 심지어 선교사, 목사와 같은 사역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외형적인 변화로 자신도 속고, 타인도 속일 수 있습니다.
또 진심(眞心)만의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전심(全心)’과 ‘진심’은 비슷해보여도 내용은 아주 다릅니다. 전심이란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한, 말 그대로 100%의 마음입니다. 반면에 진심은 마음의 깊이는 있으나 전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결국 진심을 담아 골똘히 어떤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런 진심은 다른 것에도 동일한 진심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진심으로 예배드리고 나서 손님 접대한다고 술집에 가서 진심으로 술자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심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온 마음을 다해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 관원이 진심으로 영생을 구했지만, 돈인지 영생인지 택하라고 했을 때 고개를 떨구고 돌아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그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거룩도, 영생도 취하고 싶고, 재밌는 세상 유혹과 정욕도 놓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양 손에 모든 것을 쥐고서는 전심을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초점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며, 인간의 존재적 변화입니다. 당신은 그 마음의 중심이 주님께로 바뀌었습니까? [복음기도신문]
복음을 영화롭게 하라
(김용의.규장.2017)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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