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그냥 사는 것이 선교에요”

▲ U국 영혼들을 사랑하는 K·L 선교사(보안지역에서 사역중인 관계로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 복음기도신문

부모님 건강 때문에 잠시 한국에 나오게 됐다는 K 선교사 부부를 만났다. 코로나 사태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면서 U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한국에서 U국의 성도들과 교제하며 앞으로 진행될 일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U국 선교 15년차를 맞는 K 선교사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U국에서는 어떤 사역을 하고 계세요?

K: “5명이 한 팀이 되어서 교회 개척과 신학교, 학교 사역 등을 섬기고 있고, 그 외에도 현지인들을 돕는 여러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냥 그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지금까지 5개 교회가 개척됐고, 신학교도 이동식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저희가 있는 곳은 전기가 3년 전에 들어올 정도로 오지이고 U국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에요.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려면 대도시에 나가야 되는데 여건이 안돼죠. 그래서 신학교 강사진이 이곳에 와서 신학교가 열려요. 지금은 총 3기가 끝났고 안수 받은 목회자가 7명이 됐어요. 이들이 개척된 5개 교회의 담임을 맞고 있고 아직 신학 과정 중에 있는 목사가 5명 있어요.”

기독교인들에게 우물물을 마시지 못하게 했어요

– 코로나 상황은 좀 어떤가요?

L: “U국은 코로나로 3월부터 봉쇄가 되면서 가정들의 생계가 어려워졌어요. 그런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250가정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해주시는 분들에게 소식을 알렸는데 재정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들어와서 1000가정을 도울 수 있었어요. 처음 구제를 시작했을 때 교회를 핍박했던 마을도 찾아갔어요. 그 마을에서 처음 예배드릴 때 마을 회관을 빌려서 드렸는데 마을 사람들이 못하게 했어요. 힌두교 마을에서 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냐면서요. 결국 나무 그늘이나 가정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죠. 지금은 수도시설이 있지만 14년 전에는 공동 우물이 있었는데, 기독교인들이 먹으면 더러워진다고 못 먹게 했어요. 그래서 1~2km를 걸어서 농업용 우물물을 떠다 먹었어요. 기독교인이 농사짓는 밭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기도하면서 얻게 된 교회 건물에 전기를 끊기도 했어요. 그런 곳에 구제활동을 하게 된 것이죠. 4인 가족이 2주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포장해서 4차에 걸쳐 나눠줬어요. 1차 때는 몇 가정이 기독교인이 거기에 뭘 섞었는지 어떻게 아냐면서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점점 어려워지자 2~3차 때는 받고 싶다고 요청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당신들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다. 이렇게 어려울 때 돕는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은 우리가 핍박했는데도 도와준다. 살아계신 하나님 맞다.”면서 고백을 했어요. 다른 지역 목사님들 이야기 들으면 예전에는 마을에 가면 ‘왜 왔냐?’며 ‘예수 전하러 왔냐?’면서 화를 냈는데 지금은 어서 오라고 인사를 한다고 해요. 구제를 통해서 반응이 긍정적으로 바뀌어서 감사해요.”

– 주님이 코로나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여셨군요. 그리고 사역의 길이 열렸나요?

K: “그곳에서 처음에는 문맹퇴치학교가 시작됐어요. 그때는 다른 선배 선교사님들이 개척을 하고 나무 밑에서 가르쳤다고 해요. 한 2년 반 이상을 진행하고 나니까 문맹은 퇴치됐어요. 그리고 학교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마을 사람들이 학교를 지어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그때 당시 우리 가정은 한국에서 이 마을을 오랫동안 지원하고 돕던 교회에 다니고 있었어요. 당시 아프리카로 떠나려고 준비하던 저희에게 교회가 U국의 이 마을을 섬겨달라고 요청하셨어요. 기도하는데 주님이 교회가 품고 기도하는 나라에 선교사가 함께 마음으로 품고 나갈 것을 말씀해주셨어요. 그렇게 2006년에 처음 U국에 오게 됐고 2년 후 학교 건물을 완성하고 개교를 했어요.”

– 학교 사역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K: “어느 날 7학년 여자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물어봤는데, 시집을 갔다는 거예요. 조혼 풍습이었어요. 시골 지역일수록 더 일찍 시집을 보내죠.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어요. 여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서 거리에 피켓을 들고 나가서 조혼 폐지 운동을 벌였어요. 때마침 U국 정부도 조혼 금지 캠페인을 벌일 때라 마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L: “이 나라는 딸이 결혼할 때 지참금을 많이 가지고 가야 돼요. 그래서 딸 낳는 것을 반기지 않아요. 아들은 집안의 재산이라고 생각하지만, 딸은 낙태를 많이 당하죠. 남자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가지만, 여자아이가 아프면 그냥 내버려ㅈ두고 죽게 놔둬요. 그래서 여아 사망률이 더 높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취급을 받으니 여자아이들은 공부를 시키지 않아요. 결혼만 시키면 되니까요. 그래서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여자아이들도 교육을 시켜야한다고 계몽하고 다녔어요.”

피켓을 들고 조혼 폐지 운동을 벌이기도 했어요

K: “덕분에 학교에 여자아이들의 비율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기독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시집도 잘 간다는 소문도 생겨서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오는 아이들도 많아졌어요. 좋은 소문이 나서라기보다 학교 자체가 학습의 장으로 쓰일 수 있는 게 감사해요. 학교에 오면 모든 아이들이 아침에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쳐요. 힌두교인이지만 기독교 신앙 교육을 하는 것을 알고 오죠. 질 높은 교육 때문에 감수하고 와요. 그 덕분에 학생이 예수를 믿고 가정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어요.”

– 너무 감사한 일이네요.

L: “우리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하면 학생들 가족들도 다 와요. 3000~6000명 정도가 참석하는데, 예배도 드리고 성극도 하면서 복음을 전해요. 그날은 당장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목회자들이 마을에 방문해서 심방을 하다 보면 학부모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이 학교가 복음의 귀한 전초 기지 역할을 하고 있어요.”

– 또 어떤 사역들이 있나요?

▲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10그루씩 망고나무를 심고 있다.
제공: K·L 선교사

K: “선교 농장 사역도 하고 있어요. 버려둔 땅이 있어서 30년 임대 계약을 하고 센터를 건축했어요. 그곳을 선교 농장으로 하려고 망고나무도 심고 배추, 무 등 야채를 심었어요. 처음엔 실패했는데, 3년째 성공했죠. 처음에는 야채들을 무료로 필요한 곳에 나눠줬는데 규모가 커지다 보니 지금은 한국 선교사들이나 한국 회사를 대상으로 판매하고 있어요. 이익이 생기면 그만큼 더 많은 현지인들을 고용해서 인력 창출을 해요. 이곳은 시골이어서 도시에 나갈 수 없는 약한 분들도 계세요. 그런 분들과 함께 일을 해요.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어서 많이 슬퍼하셨어요. 재작년부터는 우리가 한국 야채를 키운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U국 여러 지역에 기차로 배송하는 일도 하게 됐어요. 선교지에서는 한국의 모든 것들이 많이 귀하죠.”

– 여러 방면으로 섬기시고 계시군요? 또 다른 사역도 있나요?

K: “선교 농장과 더불어 지역 개발 사역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우물파기도 해 보고, 장학생을 한국교회와 연결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우리가 망고나무를 심고 나서는 망고 씨를 한국 기업에 수출하게 됐어요. 망고 씨에서 나오는 오일이 화장품 원료가 된다고 해요. 이곳은 망고가 많기 때문에 버려진 씨가 많아요. 그것을 수거해서 공장으로 넘기는 일이었는데 이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어요. 대지주는 계약할 수 없었어요. 회사측은 노동자들에게 소득이 분배되는 구조를 원했는데, 보통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에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선교사밖에 없었어요. 한국에서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땐 ‘선교사가 뭘 이런 걸 하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회사측에서 이 사업이 단순히 돈만 버는 게 아니라 이곳 여자아이들을 지원해 주는 의도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어요.”

저희 선교 방향은 함께 세워가는 하나님 나라에요

▲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10그루씩 망고나무를 심고 있다.
제공: K·L 선교사

– 여자아이들을 어떻게 지원해주는 건가요?

L: “우리 주에 있는 한 마을에서는 100년 전부터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망고나무 10그루를 심었대요. 천시 받는 여자아이들을 위한 계몽 운동이었죠. 아이와 함께 망고나무도 자라면서 아이의 교육비용뿐만 아니라 나중에 결혼 비용이 나오는 것이었죠. 이런 이야기를 듣고 회사가 우리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어요. 이 지역 아이들에게 혜택을 주자고 했죠. 망고 씨를 주민들에게 받고 그 수익금으로 그 마을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망고나무 10그루를 심어 주자고 했어요. 그렇게 6년 동안 1만 그루를 심은 것 같네요.”

– 그런 현장을 두고 지금 여기 계시는군요. 앞으로 언제 선교지로 돌아가실 계획이죠?

L: “어떤 분들은 이제 사역지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다고 말씀하세요. 교회도 이제 자립이 되어가니까요. 우리가 꼭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봤어요. 선교사 훈련을 받을 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한 선교사님은 선교하던 나라에 내전이 일어났는데 모든 외국인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내전의 중심지를 뚫고 들어갔다는 거예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흔들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려고요. 그때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음의 형제를 격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그 위험을 뚫고 갔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 코로나 때문에 당장은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요. 믿음의 형제들이 흔들릴 것 같아서가 아니에요. 그들을 격려하고 싶어서였어요. 저도 그분들하고 같이 살고 싶어요. 이게 선교인 것 같아요. 서로 사랑하면서 격려하며 살아가는 것 말이에요.” [복음기도신문]

<이상 236호에 게재>

K: “우리 선교의 방향은 ‘함께 세워가는 하나님 나라’에요.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이죠. 그 누구든 같이 복음을 나누고 고민하고, 함께 울고, 웃고, 그렇게 같이 살아가는 게 선교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자녀들에게도 가르치고 싶어요.”

L: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가 선교사라는 것을 잘 몰랐어요. 아빠는 비즈니스맨, 엄마는 선생님으로 알았어요. 그런데 큰 아이가 한 선교단체 모임을 참여하고 연락이 왔어요. 엄마, 아빠가 왜 U국에 그렇게 어렵게 사는지 몰랐는데 이제 알게 됐다면서 엄마, 아빠가 선교사님이시군요. 라고 말했어요.”

– 자녀분들도 힘든 시간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L: “우리 아이들은 모두 현지학교를 갔는데, 친구들이 따돌리기도 하고 맞고 오기도 했어요. 마음을 터놓고 말할 친구들이 없었어요. 큰 아이는 처음에는 말을 못 알아듣다가 나중에 친구들이 놀리는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어요. 고민해보자고 하고 밤에 남편과 이야기한 후 아들에게 다음날 돌아가자고 했어요. 대신 아빠는 못가고 엄마와 동생들만 간다고요. 우리가 가족인데 네가 힘들다는데 너를 도와주기 위해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했죠. 그랬더니 3일만 기도하게 해달라고 아이가 요청했어요. 3일 후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날부터 ‘떡볶이가 먹고 싶다. 어묵이 먹고 싶다. 붕어빵이 먹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집에서 쌀을 찧어서 떡을 만들어서 떡볶이를 해주고, 민물 생선으로 어묵도 해줬어요. 붕어빵도 가능한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서 이제 한국음식 안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 인도친구를 사귀기 시작하고 평안하게 됐죠.”

–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특별한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여겨지네요. 교회개척 사역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K: “우리가 현지에서 이뤄지고 있는 모든 사역은 사실 현지인들과 관계를 맺게 해주고 그리고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통로가 되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에게 교회개척 사역이 가장 소중하죠. 교회가 한 곳에 세워지면 성도들이 여러 지역에서 오게 되죠. 그래서 한 지역 사람들이 50명 정도 모이게 되면 그 지역에 교회를 분립개척해요. 또 그 교회에 성도가 또 많아지면 다른 지역에 분립개척을 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벌써 손자 교회까지 개척된 곳도 있어요.”

– 우리나라 교회 개척방식과는 완전히 다르군요.

L: “이 나라에는 건물만 남아있고 유지가 안 되는 교회가 많아요. 교회 규모는 크지만, 재정 자립이 안 된 교회도 있어요. 주로 해외에서 재정 공급을 받기 때문이에요. 준비된 목회자도 없어요. 이런 상황을 알게 되면서 사역자를 키워야 되겠다고 결정하게 됐어요. 그렇게 신학교가 시작이 됐어요.”

K: “예전에는 이곳에서 노방전도를 해도 문제가 없었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교회가 파괴됐어요. 외국인인 우리가 사역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때부터는 사람을 세우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우리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현지인들을 섬기다보니 더 많은 교회가 세워져야 하는데 훈련된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신학교를 하게 됐고, 현지 지도자들이 스스로 필요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현지 교회를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게 됐어요. 현지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도하고 있어요.”

– 사역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K: “우리가 있는 곳은 힌두지역이에요. 또한 불법 공산당이 있는 지역이에요. 이들은 산 속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고 갑자기 기차를 세우고 테러를 하기도 해요. 마을에서 부유한 사람이 있으면 사업비의 절반을 빼앗고, 안내면 죽인다고 협박하고 죽이기도 해요. 마을 사람 대부분이 두려움 때문에 공산당을 지원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 마을에 들어 와 살기 시작한지 8년 됐는데 그 사이에도 많은 살인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도 우리를 협박하던 공산당 간부 아들이 우리 학교를 다니면서 그 가족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됐어요. 감사한일이죠. 처음에는 전기도 물도 없고 공산당이 들끓는 이런 지역에 가야됩니까. 하나님께 묻기도 했어요. 그곳으로 이사한 후 오랫동안 지역의 교인들이 매일 아침 6시에 간밤에 아무 탈 없었냐며 전화를 걸기도 했어요. 그래도 그 땅을 위해 축복하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라고 말씀해주시기 때문에 화평할 수 있는 부분을 많이 찾았어요.”

– 끝으로 향후 계획이나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K: “이곳에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현지어 교재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현지어로 번역해서 언제든지 공부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출판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한국에 계신 어머님이 다행히 건강이 좋아지셨지만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또 선교지에서는 의료 혜택을 못 받기 때문에 우리 가정의 건강을 붙잡아주시도록 기도해주세요.”

L: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믿음의 부모가 됐으면 좋겠어요. 자녀들도 이 믿음의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현지에 세워진 믿음의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견고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떠나도 성령 충만으로 목회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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