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호 / 복음이면 충분합니다-반드시 누려야 할 은혜의 복음(3)]
부패한 세계와 모든 열방이 주님을 찬양하는 날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점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약속하고 있다(계 7:9~10). 심판과 저주가 끝나고 사막에 꽃이 피며 더 이상 슬픔과 애통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쉬지 않고 임하고 있다. 그 영광 보기를 원하는 자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순전하게 믿는 자들은 어떤 태도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가? 성경은 ‘산 제물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롬 12:1 이하).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살리셨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면 완전히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해야만 한다. 신부가 신랑을 향한 열심(고후 11:2)으로 자신을 가꾸는 것처럼, 적당히 발목만 물에 담가보는 수준이 아니라 은혜의 바다가 자신을 집어삼켜 그 안에서 엄청난 영광과 능력과 축복을 만끽하는 자리까지 나가야 한다.
‘제물’은 이미 완전히 죽은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부로 주신 복음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전부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계신 주님을 누리는 교제의 방법이며 동시에 영적 예배의 핵심이다(요 4장).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믿어야 한다.
‘헌신’이라는 말이 우리의 정서에 우울함이 느껴진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나의 옛사람으로는 주님께 결코 헌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헌신은 결국 ‘자기 열심’에 불과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헌신’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함께 죽은 우리의 옛사람을 믿음으로 부인하고 이제는 오직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며 나를 내어드리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나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신 삶’이 곧 헌신이다.
헌신을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신뢰함’이라 할 수 있다. 병을 고칠 때도 의사를 신뢰해야 내 몸을 맡길 수 있듯, 나의 인생과 내 존재 전부를 맡기려면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이 실제가 되어야만 한다. 신학적인 동의나 교회를 오래 다녀 직분을 얻은 것과 ‘삶을 드려 나를 주님께 맡기는 일’은 다르다. 은혜는 받고 싶지만 일생 전부를 주님께 맡기는 건 부담된다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기억해야 한다. 약속을 성취하고야 마는 절대 주권의 하나님은 그가 부르신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실패에 단 한 번도 당황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약속한 모든 일은 역사 가운데 분명한 실체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의 결론은 말씀인가 상황인가? 주님의 약속이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보다 더욱 실제인가? 우리는 새끼손가락 하나도 내 힘으로 들 수 없는 존재다. 주님이 일부러 무능한 자들을 불러 능력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이유는, 그 능력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고전 1:25 이하). 때문에 주님은 우리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주님 안에 거하는 믿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 믿음조차도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먼 미래까지 버틸 믿음이 아니라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 분초 마다 주님 붙드는 믿음을 취하자. (2017년 6월)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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