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권적인 은혜의 복음 (8)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어느덧 복음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많은 과정을 겪다 보니 복음에 지치고, 하나님에 대하여 식고, 이제는 은혜를 더 받을까봐 무섭고, 다 아는데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던 힘겨운 복음의 걸음에 슬그머니 평범이라는 유혹이 강하게 밀려오기 시작한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겠다고 큰소리치고 용기 있게 나섰지만, 주님이 빨리 오시는 것도 아니고, 나도 천국에 당장 가지 않고, 세상은 여전히 강하게 버티고 있으니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평범이라는 유혹에 자꾸만 마음을 열게 된다.
‘나 혼자 가는 것 아닌가? 끝까지 잘 갈 수 있나?’ 그동안 속지 않았던 그 병든 자아의 예민한 감정과 인간적 욕정이 일어나고 인정과 평판과 사람 냄새가 자꾸만 그리워진다. 이미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결론 났고 그 속임에서 벗어난지 오래됐지만 때로 영혼과 마음에 병이 들어서 힘겹게 진리를 위해서 싸우다가 어느덧 첫사랑이 식고 나면 평범의 유혹에 빠져든다. 이 자아의 타락한 욕구는 아직 마음 안에 포기하지 않은 옛 정서를 자꾸만 부추기고 끌고 가게 된다.
똑같이 봉사하고, 복음을 외치고, 기도의 자리로 가는데 이전과 다르게 주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베푸셨던 이 상상할 수 없는 돌아온 아들을 위한 잔치, 그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주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마음에 칼을 갈게 된다. 그토록 대단한 신학지식, 종교적 위상, 복음적 진리를 다 가지고 있고 몇 대째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교회 문화에 익숙하지만 구원의 감격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집안의 탕자, 큰아들 같은 자가 바로 나 아닌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요만큼도 없는 자가 바로 나 아닌가.
주님의 이 거룩한 잔치에 초청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청함 받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빠졌던 오만 때문에 그렇지, 거기 갈 자격 있는 자가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초청을 받을 합당한 자가 누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수 없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강제로 불러다가 그 은혜의 잔치를 벌여주신 것 아닌가.
이 놀라운 감동적인 메시지를 듣고 집 나간 탕자, 둘째 아들에게 분노했다면 아버지의 말에 주목하라. “얘야! 네가 받은 게 다 네 자격 때문이 아니라 다 은혜로 주어진 것 아니냐. 네가 받고 누리는 모든 것들은 네 수고의 대가로 받은 게 아니라 그저 값없이 너에게 주어진 것 아니냐. 내 것은 다 네 것이란다. 그런데 기억해! 네 동생, 네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 잔치의 주인공인 네 동생이야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므로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니냐.”
이 말은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이 드라마에 겉으로 드러난 죄인은 동생이었지만 형이 덜컥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순간, 드러난 모든 것이 바로 자신의 죄된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2018년 4월)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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